지금의 삶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일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사람에겐 인생의 특별한 순간이 찾아오는 것 같다. 그동안 아무 의심 없이, 당연하듯 살아왔던 삶의 과정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그런 '결정적 순간'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경우가 그랬다. 고전문헌학을 전공하고, 스위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일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그는, 철학자 칸트처럼 30여 년을 정해진 시간에 맞춰, 빈틈없이 판에 박힌 일상을 이어가는 고리타분한 인상의 평범한 선생님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아침, 출근길로 익숙한 키르헨펠트 다리를 지날 무렵, 그는 자살하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던 한 묘령의 여자와 맞닥뜨린다. 신비롭게 들렸던 포르투갈어를 쓰는 그녀와의 짧은 만남이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결국 주인공의 인생 행로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결정의 순간이 왔다고 느낀 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갈어의 매력에 빠져 근처 에스파냐 서점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우연히 손에 얻은 어느 포르투갈 귀족이 쓴 [언어의 연금술사]란 책에 매료된 그는 직관적으로 새로운 인생의 목적지를 선택하게된다.
소설 속 표현대로,
그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도망치려는 참이었다. 57년이 지나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완전히 장악하려 하는, 불안과 해방감이 섞인 기분
으로 그레고리우스는 그날 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티켓을 끊는다.
오랜 시간을 달려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책 한 권에 의지해 저자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행적을 쫓아가기 시작한다.
그레고리우스는 헌 책방을 시작으로, 저자 프라두가 다녔던 고등학교, 그의 여동생들과 친구, 지인들을 만나면서 그의 싦에 대한 단서를 하나씩 모아가기 시작하고, 그의 내면을 써 내려간 책을 통해, 마침내 포르투갈의 역동적인 역사 한가운데서 고뇌하며 살아간 한 천재 의사의 삶과 직면하게 된다.
아마데우 드 프라도는 40년 동안 이어진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 정권하에서 판사로 재직하던 아버지와 아들에게 최고만을 바랬던 엄격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배경과 뛰어난 천재성으로 주위의 모든 이들로부터 관심과 감탄의 대상이었던 그였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그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부모의 바람대로 의사가 되어 미래가 보장된 삶을 살아가던 그였지만, 자의식과 감수성이 뛰어났던 그가 진정 사랑했던 것은 문학이었고, 그중에서 특히 시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은 자서전처럼 써 내려간 그의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이 원한 삶은 아니었지만, 본업인 의사의 삶에서 의미를 찾으며 존경받는 의사로서 살아가던 그에게 큰 시련이 닥친다.
어느 날, 독재의 앞잡이로 죄 없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인, 리스본의 인간백정 '후이 루이스 밴드스'가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온 것이다. 잠깐 동안의 갈등은 있었지만 그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으로 그를 무사히 살려낸다.
하지만 그로 인한 후폭풍은 매우 컸다. 분노한 시민들은 프라두의 행위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점점 깊어가는 자괴감으로 그는 의사업무까지 지속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른다.
의사로서의 본분과 역사의 배신자로서의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숱한 고민 끝에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그것은 독재정권하에서 암암리에 전개되었던 저항운동에 참가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 결정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저항단체에서 마주친 신비한 여인, 에스테파니아와의 만남은 그로 하여금 둘도 없는 친구 조루주와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며, 또다시 그의 삶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살았던 장소와 지인들을 만나고, 그의 책을 통해 파란만장한 그의 삶의 행적을 쫓으며 자신의 인생 또한 반추해 본다.
프라두와 달리 가난했던 그의 가정과, 부모님들, 플로렌스와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한 때 꿈꾸었으나 포기했던 페르시아 이스파한으로의 여정...
얼핏 보면 파란만장했던 프라두의 삶과 아무런 변화 없이 한 길만 걸어왔던 그레고리우스의 삶이 사뭇 달라 보이지만
그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는, 그들의 삶들이 진정 자신들이 원했던 삶이었을까 하는 자각에서 오는 깨달음이었다.
주어진 환경 때문에, 주변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한 선택이었다며 자기 합리화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또 그렇게 그 속에서 화석처럼 고착화되어, 인생에 대해 아무런 의구심도 가지지 않은 채 이어온 삶들은 아니었는지...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갑자기 리스본 야간열차를 끊은 날 수십 년간 다녔던 김나지움 교장에게 사직서를 쓰면서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한다.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 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레고리우스를 리스본으로 이끈 것 또한 프라드가 쓴 [언어의 연금술사]에 인용된 같은 맥락의 한
문장이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에스파냐어를 배우는 것, 그가 존경하는 영웅의 도시에서 사는 것, 에스테파니아의 강의를 듣는 것, 여러 수도원 역사를 공부하는 것, 프라두의 글을 번역하는 것 등등...
리스본에서 돌아온 그레고리우스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과거와는 다른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현기증으로 진찰을 받기위해 병원 문을 들어서면서, 그는 또 다시 프라두의 글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즈음, 그레고리우스와 프라두가 나에게 묻는 듯했다.
그대, 지금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혹시 진정한 삶을 찾아 떠나는 인생의 기차표가 필요하진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