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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편지

지도자의 마지막 품격

by 정현미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밤을 하얗게 만들었던 대통령의 계엄이 선언된 지 만 한 달이 지났다.




12월 3일, 화요일 10시 반, 평범한 담화 형식을 빌린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계엄발표에 온 나라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이어졌고, 새벽 1시를 넘긴 시각, 우여곡절 끝에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안이 극적으로 가결되었다.

하지만 서늘해진 간담을 쓸어내리느라 피 같은 잠을 저당 잡힌 국민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대통령의 계엄철회 발표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새벽 4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제대로 된 국무회의조차 거치지 않고, 국회에 알리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무력으로 국회를 점령하고, 국회위원들의 국회진입을 막는 등,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계엄 선포 행위가 위법임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차고 넘쳤다.

하지만 이를 수습해야 할 대통령은 손바닥 뒤집듯 자신의 입장을 수시로 바꾸고 있다.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처음의 발표와는 달리, 뒤이은 담화에선 돌변한 태도로 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국민들을 상대로 끝까지 싸울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1월 3일, 내란죄에 대한 공수처의 체포 영장 집행이 임박하자 그가 취한 행동은 더 가관이었다. 탄핵에 반대하며 한남동 관저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친히 편지까지 전달하며 끝까지 싸우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

그는 탄핵에 찬성하는 70% 이상의 국민들과, 탄핵안을 상정한 국회, 탄핵을 심판할 헌재, 체포영장을 허락한 법원등, 자신을 국가내란 피의자로 만든 모든 대상을 주권침탈자며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또한 편지를 통해 자신을 절대왕정의 군주처럼 떠받드는 극우 유튜브 방송을 시청한다고 밝힌 그는, 소수의 지지자만을 국민으로 인정하고 그 외는 타도해야 할 적들로 간주하며, 결국 국민들을 상대로 전면전을 선동한 꼴이 되었다.


윤석열의 이런 비굴한 행태는, 시대의 변화와 요구를 인식하지 못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18세기 프랑스의 무능한 군주,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최후를 맞이하는 행동과는 사뭇 대비되는 면이 있다.




프랑스혁명이 한창이던 1879년 8월,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궁전이 점령되자 왕과 그의 가족들은 궁을 떠나 탕플 감옥으로 옮겨진다.

그 해 9월, 바깥에선 반대파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광란의 대학살이 이어졌고, 그 후 왕권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루이 16세는 너무나 태연하고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한 편, 왕정을 옹호하는 국내외의 왕당파들은 루이 16세를 앞세워 반란을 꾀했다. 특히 국외에 있던 왕의 동생들이 더 적극적으로 왕정복고를 밀어붙였는데, 사실 그들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루이 16세를 반란의 중심에 세울수록 그가 더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결국 다음 왕의 차례가 자신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음흉한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의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인 루이 16세는 평소처럼 무기력한 모습으로 처형장에 나타났지만 마지막까지 국왕의 품위를 잃진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최후의 연설에서, 자신을 죽인 자들을 용서하지만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이제 더 이상 피를 흘리는 일이 없기를 간곡히 바란다라는 말을 남기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편, 감옥에 갇혀 왕의 죽음을 그저 마음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는 형식적인 재판 과정이 끝나고 나면 자신 또한 왕의 뒤를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시시각각 엄습해 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녀는 다정다감했던 시누이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미처 끝맺지도, 전달되지도 못한 편지 속의 그녀는 죽음을 앞두었다고 하기엔 무색하리만치 담담하고, 심지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사랑하는 아가씨,

나는 지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선고입니다. 그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과 마찬가지로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양심에 꺼리길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극히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 중략.......


아이들이 자란 뒤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착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주장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 곧은 심지를 가지고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딸은 연상이므로 누나로서 풍부한 경험과 아름다운 마음씨로 동생에게 충고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와 봉사의 태도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두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

아이들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


아이들 아버지(루이 16세)의 마지막 말을 절대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짐은 그대들을 용서한다. 이후로 아무도 피를 흘리지 말았으면 한다.) 훗날을 경계하기 위해 되풀이하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나는 가톨릭의 사도적인 신앙심을 품고 죽고 싶습니다.

......


하느님께서 옛날부터 그래오신 것처럼 나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시고 동정과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받아들여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주었던 모든 괴로움을 용서해 주기를 나의 모든 사람 특히 사랑하는 아가씨, 당신께 기도합니다.

나는 내게 고통을 주었던 나의 모든 적들의 죄악을 모두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형제, 자매에게 안녕을 고하려고 합니다.

내게는 벗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내가 지금 죽으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생각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다정한 아가씨. 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들과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서 포옹합니다. 당신과 아이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이젠 신앙의 의무만 남았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 사제 한 사람을 임의로 데리고 오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전혀 낯 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편지 속 그녀는 자식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품은 한 평범한 어머니였고, 주변 사람들을 신뢰하며 깊은 신앙심을 가진 여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기품과 교양이 몸에 뵌 여느 여염집 아낙네일 뿐이었다.

당시 썩을 대로 썩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우기 위해서 악마화할 대상이 절실했던 혁명정부에게, 적국에서 시집온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왕비는 그 역할에 딱 맞는 적임자였을 것이다.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거나, 남편을 잘못 만났다는 동정의 여지를 감안하더라도 나라를 그 지경에 이르게 한 그들의 무능은 쉽게 용서받을 수 없다.

한편, 무능하다는 면에선 결코 뒤처지지 않는 윤석렬은 이번엔 폭력을 동원해 국가를 전복하려는 시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프랑스 국왕부부가 나라를 버리고 국외로 도망치려는 시도가 그나마 남아있던 그들에 대한 백성들의 동정심마저 싸늘하게 식어버리게 만든 것처럼, 윤석렬의 계엄 선포는 그동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삼켜왔던 그의 숱한 무능에 대한 국민들의 인내심을 기어이 폭발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소수의 지지자들을 이용하고 선동하는 그의 편지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편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졸렬한 것처럼, 이미 끝난 상황에 대한 그들의 대처 방법 또한 차이가 크다.


공수처가 가지고 온 적법한 체포영장도 무시한 채, 마치 자신의 친위 군대처럼 경호처의 모든 인력을 동원해 무력으로 공무집행을 막는 행위에선 대통령의 그 어떠한 품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선전선동으로 국민을 갈라치기하며 내전도 불사하겠다는 식의 안하무인적 태도는 시정잡배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의 비겁하고 치졸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진 않았지만, 구 체제의 상징이었던 왕과 왕비마저 그나마 자신들에게 주어진 처벌은 품위 있게 받아들였건만, 자신이 왕인 줄 아는 그는, 온갖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기껏해야 5년짜리 대통령인 그는 알고 있을까?

그가 야기한 이런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그나마 국민들에게 자신을 변호할 마지막 기회마저 저버리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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