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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명절의 의미

새로운 명절의 의미를 찾아서...

by 정현미

설날 연휴를 코앞에 둔 요 며칠, 오랜만에 집을 찾을 아들들을 위해 먹거리를 고민하느라 마음이 분주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일은 몇 년 전의 명절에 비하면 유도 아니다.




20대 후반, 아무것도 모른 체, 홀어머니 슬하의 장남과 결혼한 나는 시집온 직후부터 일찍 돌아가신 시아버님 제사를 곁에서 시중들어야 했다, 10년 후 갑자기 돌아가신 시어머니 제사까지 더해져 마치 나의 업보인 양, 근 25년 이상을 명절과 기제사를 지내며 살아왔다.


가난했지만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모든 집안일을 면제받으며 책과 공부만을 벗했던 나에게 그 이외의 생활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크나큰 고역이었다.

신혼 초,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고 시장에서 물건 하나 흥정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느꼈던 나이기에, 처음에는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시어머니 곁에서 제사를 배우며 옛날 어르신이 하던 그대로 흉내 내려고 무던히 노력했었다.


하지만 마음속엔 늘 무언가가 응어리져있었다.

지금껏 내 부모, 나의 조상에게도 하지 않았던 일을, 엄연히 따지면 남의 집에 갓 들어온, 오롯이 타인인 내가 책임지며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물며 줄곧 맞벌이를 하고 자식들 또한 내 담당인 마당에

잘해봤자 본전인 집안 대소사를 꾸역꾸역 해오며 난 그렇게 지쳐갔나 보다.

유교의 많은 덕목 중, 유독 가부장제를 취사선택하여 오랜 세월 위정자들의 구미에 맞는 이데올로기로 강화된 우리네 현실에서, 내가 받은 대학의 짧은 신식 교육은 한쪽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부당함과 구시대적인 문화를 거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익숙해지리라 여겼던 일들이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여전히 바깥 일로 바빴던 나는 명절이나 제사가 있는 달이면 한 달 전부터 머리에 이어 몸까지 아파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히스테릭한 행동과 말들을 만만한 남편에게 쏟아부었고, 서로를 향한 가시 돋친 말들이 큰 말다툼으로 번지면서, 해가 갈수록 각자의 마음속엔 아픈 생채기들이 하나씩 쌓여갔다.


하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장기전을 염두에 두었던 나는 우리 세대에선 원죄처럼 지고 가더라도 자식 새대엔 기어코 정리하리라 맘먹으며 자신을 다독이곤 했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들이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지점에서 풀리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바로 한 시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코로나 시국이었다.




코로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또한 변화시켰다. 대면접촉을 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모든 시스템이 비대면화되면서 우리의 생활 또한 급속도로 온라인화, 개인화되었다. 처음엔 공포와 낯선 환경에 혼란스러워하던 사람들도 유전자에 각인된 강한 생존본능이 발휘된 덕분인지 모든 상황에 빠르게 익숙해져 갔다.


그 시절을 견뎌내며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이러스 하나에 견고한 성처럼 보였던 시스템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사람의 목숨이 덧없이 스러져갈 때, 과연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나의 남은 삶은 어떠할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마치 우환이 깃든 집에 불청객처럼 들이닥친 갱년기와 함께 그동안 미뤄두었던 숙제가 한꺼번에 쏟아지듯, 소위 오춘기의 당면과제들이 속사포처럼 나를 향해 난사되었다.

이제 아이들도 성인이 되고, 철없던 새색시의 어른 되기 연습도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른 것 같다. 그동안 몸에 맞지 않지 않은 옷을 입으려 꾸역꾸역 내 몸을 구겨 넣으려 했던 어른 흉내내기도 이제 그만하려고 한다.


이제 오롯이 나만을 위한 삶의 여정을 준비하리라 다짐하며 무거운 입을 뗐을 때, 의외로 이해해 주는 가족들의 반응에 감사하며 생각했다. 늘 타인의 몸을 뒤지며 찾으려 했던, 암암리에 내 몸을 죄어오던 의무와 책임의 사슬의 열쇠가

사실은 내 손안에 쥐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작년부터 명절엔 시동생 가족들과 시부모님 산소에서 보기로 했다. 소박하게 준비한 음식들로 간단히 차례를 지낸 후, 근처에서 밥을 먹고 시간이 되면 카페에서 차도 마셨다.

요즈음은 당일에 문을 연 식당과 카페도 많고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방문하는 장소마다 발 디딜 틈이 없어서 처음에는 놀라기도 했다.


이번 설날에는 시누이 가족도 온다니 그야말로 대식구라서 얘들 삼촌이 식당 예약하느라 분주한 모양새다.

나는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아들들에게 명절엔 꼭 내려오라고 당부했다. 사실 얼마 전까지 힘들까 봐 내려오라는 말을 섣불리 하지 못했었는데, 이때가 아니면 언제 볼까 싶어 어른으로써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남편과 나는 산소에 가져갈 음식과 얘들 먹일 고기랑 과일들을 사느라 명절연휴 시작일부터 좀 바빴다. 외지로 이사하는 바람에 시장과는 거리가 있어 이틀 연속 마실 삼아 재래시장을 왔다 갔다 했다. 제사는 없어졌지만 물가가 너무 많이 올라 비용은 그 이상이라며 남편에게 어린애처럼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몇 년 전에 비하면 일도 아니다.

진정 우리들만의 명절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이미지는 네이버 블로그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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