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꽃구경
2022년 4월 18일
4월 초에 천주산에 가서 진달래꽃을 보고 왔다는 지인의 말에 난 시큰둥했었다.
정상에서 본 풍광이 장관이더라는 말도 귓등으로 흘리며 힘들었다는 말에만 애절한 공감을 표했던 나였다.
산이라니? 그것도 정상까지?
평지라면 남을 끌고서라도 다니고, 딱히 운동하는 것도 없다 보니 매일 5000보 이상은 일부러라도 걷는 나였지만 일단 경사진 길, 특히 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힘도 부대끼고 숨이 가빠와 지척에 있는 뒷산도 평지로 이어지는 부분까지만 걷고 정상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지난 일요일, 남편과 천주산을 오르고 있었다.
전날 밤 네이버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접한 천주산 진달래꽃에 관한 소식들이 내 시선을 끌었다.
이번 주가 그 장관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이번을 놓치면 1년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고...
거기다 여러 가지 코스 중에 초보자를 위한 등산 코스도 있다며 나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럼 한 번 가볼까?
달콤한 사탕발림에 난 그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이왕 가는 거 소풍 기분도 내 볼 겸 김밥과 과일, 음료수 등을 준비해 11시가 좀 넘어서 차에 올랐다.
북면에 접어들자 도로는 길 양쪽으로 주차된 차들로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았고, 우리의 목적지인 달천계곡 주차장까지 그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일시에 몰려든 많은 인파로 차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주차장 근처에서는 산행을 마친 차들과 시작하려는 차들이 서로 엇갈려 지나치느라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우리는 밀려드는 차량에 주차장까지는 못 가고 가까스로 비어있는 오토캠핑장 근처 길가 쪽에 주차하고 등산을 시작했다.
입구에서 달천계곡까지 가자 본격적인 등산로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천주산은 등산 코스가 다양해 곳곳에 있는 이정표를 확인해야 했다.
우리는 함안 경계를 지나는 천주산 누리 길을 택했다. 아스팔트, 흙길, 계단길 등 다양한 길들이 끝없이 이어진 산행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경사가 급하진 않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가자니 심장이 뛰는 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리는 북소리처럼 요동쳤고, 마스크 때문에 호흡도 힘들어 여러 번 풀숲에 주저앉아 쉬어야 했다.
드디어 여태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던 진달래 군락지가 정상 근처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밀 듯 그 빛깔을 드러냈다.
결코 쉽게 내어주지는 않겠다는 듯, 그러나 오던 길이 힘들어 발길을 돌리려는 등산객의 마음 한 자락을 붙잡으려는 듯,
그렇게 도도한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남편의 독려와 쉬어가기를 반복한 끝에 도착한 어느 지점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우린 정상이 머지않았다는 희망을 품고 막 발을 들여놓은 소나무 숲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무들이 만들어준 그늘에서, 준비해 간 김밥과 과일을 먹으며 땀을 식히고 있자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피하던 산행이지만 이토록 힘든 과정을 수반한 후에야 그 달콤함이 배가되니 이 노릇을 어찌할꼬?
우리가 정상으로 착각한 곳은 만남의 광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해 온 음식이나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느라 마치 흥정이 한창인 시장처럼 분주했다.
얼마 남지 않은 정상을 자축하며 이제까지의 고생에 대해 보상받는 축제 전야 같기도 했다.
우리도 덩달아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에 잠시 감격하던 순간,
천주산 정상까지 0.4km 남았다는 푯말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눈앞에 맞닥뜨린 나무계단...
까짓 거 저기만 오르면 정상이렸다?
하지만 너무 쉽게 보았다. 곧 정상을 만난다는 기쁨도 잠시,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을 오르느라 온몸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나타난 복병에 우린 적잖이 당황했다. 우습게 여겼던 0.4km는 정상까지 수직으로 뻗은 사다리 길이에 다름 아니었기ㅠ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정상!
그 일대를 뒤덮고 있는 진달래 물결을 보자마자 우린 언제 힘들었냐는 듯,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전망대를 휘젓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람들이 새벽 산행도 마다하지 않고, 멀리서 관광차를 대동하면서, 이 번잡함과 수고로움을 무릅쓰면서까지 이곳을 찾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1년에 단 한 번, 그것도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는 다시 긴 시간을 침잠하는 자연의 화려하고 신비한 아름다움에, 미미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저 모든 감각기관을 활짝 열어 그 순간을 경외하고 감탄할 뿐이다.
정상에서 전망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한 장면이라도 마음에 새기듯, 휴대폰에 꾹꾹 눌러 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산 코스에 접어들게 되었다. 올라온 코스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하산할 땐 무릎이 아프긴 했지만 마음은 한결 뿌듯했다.
올라올 땐 내려오는 사람들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이번엔 내가 그 입장이 되다 보니 산에서 무슨 금이라도 한가득 캐어 온 사람처럼 든든하고 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다.
마음이 무언가로 꽉 찬, 충만한 이 기분,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때론 앞선 사람이 날리는 흙먼지를 그대로 받아내면서
또, 뒷사람이 밀어주는 수고로움에 의지하며,
자연과 사람들이라는 재산을 마음에 쌓으며,
그렇게 산에 오르고, 그렇게 마음의 부자가 되는가 보다.
다음에 또 오자는 남편의 말에 난 선뜻 대답할 수는 없었다.
오직 정상에 오른 자만이 볼 수 있는 이 진귀한 풍광 때문에
결코 힘들다고 중간에서 돌아설 수 없게 만드는 이맘때의 천주산.
내년 이때쯤, 산행 과정에서의 모든 노고를 희석시킬 만큼 그 찬란한 분홍빛만이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는다면, 아마 그 빛에 이끌려서라도 발길이 저절로 이 산을 다시 찾지 않을까?
<에필로그>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무슨 인연인지 난 천주산과 지척인 북면에 살게 되었고, 그 선명한 선홍빛 물결이 다시금 유혹하는 계절을 지나고 있다.
하지만 '천주산 축제'라고 쓰인, 분홍빛 플래카드가 즐비한 한가운데서도, 올해 들어 유난히 피해가 컸던 산불 때문에, 흉흉한 분위기와 변덕스러운 날씨, 바쁜 생업 탓을 하며 끝내 산에 오르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2년 전 블로그에 썼던 글을 읽으며 이미 추억이 된 꽃구경을 되새김질해본다.
내년엔 추억이 다시 생생한 현실로 되살아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