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
16세기,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던 영국엔 두 여왕이 존재했다.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
조카와 고모사이였던 이 둘은 각각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다스리는 여왕이었지만 너무나 다른 인생의 역정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의 서사는 '메리 스튜어트'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특히 프랑스를 떠나(1548년) 잉글랜드로 망명(1568년) 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던 왕비로서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메리는 튜더왕조의 시조인 헨리 7세의 증손녀로, 그의 딸인 마거릿 튜더(헨리 8세의 누이)와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4세가 그녀의 조부모였고, 메리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제임스 5세와 프랑스의 막강한 귀족인 기즈 가문의 딸, 마리 드 기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리는 아버지 제임스 5세가 전쟁 중 갑자기 병사하자 생후 9개월 만에 스코틀랜드 여왕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호시탐탐 메리의 배경을 노리며 그녀와의 정략결혼에 혈안이 된 나라들이 많았지만, 이를 물리치고 그녀를 차지한 것은 그 당시 최대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였다. 프랑스로 시집간 그녀는 남편 프랑소와 2세가 왕이 되자 프랑스의 왕비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에서 병약한 남편 때문에 위태위태하던 그녀의 지위는, 남편 프랑소와가 왕위에 오른 지 1년 6개월 만에 사망하자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 의해 메리는 쫓겨나듯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된다.
6세 때 프랑스로 보내져 13년이 지나서야 돌아온 고국 스코틀랜드는 메리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때마침 종교개혁의 여파로 신, 구교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스위스에서 건너온 존 녹스를 필두로 개신교가 득세하고 있던 스코틀랜드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가 설 곳은 애초부터 없었는 지도 모른다.
가톨릭 신자이자 같은 스튜어트 왕족의 후손인 단리경과 결혼한 메리는 이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개신교도 이복오빠 머레이경 일파를 단숨에 진압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여왕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사이가 나빠진 남편 단리경이 살해되자 그 배후로 지목된 메리는 그의 암살범으로 유력한 용의자였던 보스웰 백작과 급하게 재혼을 발표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고, 스코틀랜드에서의 그녀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워졌다. 이를 기회로 개신교 귀족들과 머레이경, 시아버지 레녹스 백작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등에 업고 메리의 퇴임을 요구하며 그녀를 감금했다.
위협을 느낀 메리는 같은 혈통인 엘리자베스가 있는 잉글랜드로 망명을 요청한다. 평소 메리를 견제해 오던 엘리자베스였지만 고심 끝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받아들인다.
어릴 때부터 빼어난 미모에, 프랑스 궁전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며 모든 이의 찬사와 관심의 대상이었던 메리에 비해 엘리자베스 1세의 유년 시절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첫째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종교까지 바꿔가며 취하려 했던 여인, 앤 불린이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고, 많은 대가를 치르며 감행한 결혼이었지만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한 앤 불린은 모함과 누명을 쓴 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이후 엘리자베스의 삶은 살얼음 위를 걷는 듯
위태로웠다. 매 순간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에워쌌고 왕녀의 지위와 왕위계승권까지 박탈당한 그녀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그녀보다 앞서 잉글랜드 여왕이 된 이복자매 메리(블러드 메리) 1세의 탄압을 꿋꿋이 견뎌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서 잉글랜드 여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에게 메리 스튜어트는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완벽한 왕족의 혈통을 지닌 메리에 비해 엘리자베스는 사생아 신분으로 정통성에 흠결이 있었으며, 이를 알고 있던 메리는 이 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자신이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위서열 1위임을 인정하라며 그녀를 압박해 왔다.
그리고 영국 성공회 신자였던 엘리자베스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잉글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를 중심으로 뭉쳤으며, 그녀를 잉글랜드의 왕비로 추대하고자 모의했다.
이는 개신교 신자들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이나 프랑스와 같은 가톨릭 국가들에게도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되어 잉글랜드의 국운까지도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또한 한 나라의 군주이기에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메리가 살아있는 한, 잉글랜드 여왕으로서의 그녀의 지위는 결코 안정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인문학과, 교양, 지식을 쌓으며 어렵고 힘든 시기를 훗날 자신의 강력한 무기로 삼은 엘리자베스에 비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메리는 어릴 적 프랑스 왕궁에서의 생활로 교양과 문학적 소양이 몸에 배어 있긴 했지만 감정의 기복이 심했고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남자들에게 의존하는 성향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해 극히 우호적인 입장에서 쓰인 영국 역사에서 그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이다.
영화에서 메리는 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고귀한 혈통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다소 우유부단하게 묘사된 앨리자베스에 비해 당당한 모습이다. 참수대 앞에 선 그녀의 모습은 기품 있어 보이기까지 하다.
종교라는 큰 틀에 발목이 잡힌 채, 모든 것이 철저히 남자들 위주로 돌아가던 16세기에, 여성으로서, 한 나라의 왕비로서 세상을 헤치고 나아간다는 것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메리는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권력을 탐하기 마련인 남자와 결혼하기를 거부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매 의사결정 시마다 우유부단하게 보일 정도로 생각이 많고 신중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던 엘리자베스의 입장 또한 헤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일생을 그렇게 살았기에 그녀가 참수를 면하고 변화무쌍한 정치 현장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영화 덕분에 단편적이고 부정적으로만 여겼던 메리 스튜어트에 관한 삶의 행적을 다시 한번 찬찬히 찾아보고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에서 승자와 패자, 그 어느 누구도 그 시대의 상황과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간혹 엄격한 잣대에 의해 그들의 업적이 재평가되기도 하지만, 으레 승자의 업적은 훨씬 더 부풀려지고, 패자는 끝없이 추락할 뿐이다.
역사란 모름지기 살아남은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 기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