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로 처음 접한 '판의 미로'는 어린이들을 위한 그렇고 그런 판타지 영화인 줄 알았다.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으며 한창 스페인 내전에 빠져있던 나는 자료를 찾던 중 '판의 미로' 또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고, 이는 곧 묘한 호기심으로이어졌다.
영화 OTT 프로그램을 뒤져 마침내 영화 '판의 미로'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 아름다운 영상에 슬프도록 잔인한 이야기가 덧입혀진 이 영화는, 한 마디로말하면 흔치 않은,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였다.
영화를 본 후, 한 동안 가시지 않고 머릿속에서 부유하던 잔상들 때문에 나는 도서관에서 동명의 소설을빌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머릿속에서 되살아 나는 영화 속 신비한 장면들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이 잔인할수록 영화는 왠지 모를 처연한 아름다움의 빛을 발하는 신비한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때는 1944년, 스페인이 내전을 끝낸 지 5년이 흘렀지만
영화 속 그들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1939년 파시스트 군부세력의 승리로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정권을 잡은 군부는 곧, 파시스트 정권에 반대하는 공화파세력의 색출에 혈안이 되었고, 그들을 발견하는 즉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이에 저항하던 시민군들이 숲 속으로 숨어들자 정부군은 숲 속에 기지를 만들어 남은 잔당을 처리할 작전을 펼치게 된다. 비달대위는 이 작전에 책임을 맡은 인물이었고, 주인공 오필리아와 엄마 카르멘은 새아빠인 그가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깊은 숲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오필리아는 책을 좋아하는 소녀로 전쟁 통에 재단사인 아빠를 잃고, 엄마는 새아빠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차갑게 대하는 무자비한 성격의 비달대위를 싫어했으며, 임신중독증으로 몸이 좋지 않은 엄마를 더 아프게 만드는 낯선 환경에서 벗어나 엄마와 단둘이 살고 싶어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필리아는곤충 모습을 한 요정을 만나게 되고, 요정에 이끌려 숲 속에 숨겨진 미로까지 오게 된 그녀는 지하세계 왕의 명령을 받은 숲의 정령 '판'에게서 놀라운 비밀을 듣게 된다. 그때부터 암울한 바깥 세계와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오필리아의 신비한 모험이 시작된다.
현실에선 피도 눈물도 없이 시민군 색출에만 혈안이 된, 결코 새아빠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비달대위의 잔혹행위가 이어지고 있었고, 오직 자신의 아들을 낳아줄 수단으로 전락한 엄마는 갈수록 몸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한편, 판으로부터 지하세계의 공주였다는 말을 들은 오필리아는 자신이 흠모했던 지상세계의 햇빛 때문에 삭제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다시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보름달이 뜨기 전에 완수해야 할 세 가지 과업을 해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필리아가 겪는 세 가지 모험의 과정은 무한한 상상력과 판타지가 가미된 흥미진진하면서도 가슴 졸이는 장면들이었지만 그 속에 녹아든 잔인함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바깥세상에선 어느덧 시민군과 정부군간의 대치상황이막바지에 이르렀고, 비달대위의 무자비하고 냉혹한 성격은 절정에 달했다. 그가 시민군 포로를 고문하는 섬뜩하고 잔혹한 장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하기도 했다.
순수한 피가 있어야 지하의 문이 열린다는 판의 말에도 불구하고 갓 태어난 동생을 판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마지막 과업을 거부한 오필리아는 아들을 되찾으러 온 비달대위의 총에 맞아 결국 현실 세계에서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감독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낙담한 관객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진 않았다.
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오필리아의 순수한 피가 통했는지마침내 지하의 문이 열리게 되고 오필리아는 지하왕국의 공주 모아나가 되어 그토록 그리워하던 부모님이 분한 왕과 왕비를 만나게 된다.
'판의 미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실과 미지의 세계를 넘나드는 판타지 영화이며 동명의 소설이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론 종식되었지만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의 여파로 고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반면, 어린 오필리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판타지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악으로 상징되는 괴물들로부터 보물을 뺏앗아 마침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암울하고 잔혹한 현실의 상황들이 무척 불편했다. 한편, 중간 중간, 영화의 또 다른 축인 오필리아의 용기와 사랑의 판타지가 펼쳐지는 장면들로 소소한 위로를 받긴 했지만 못내 스며드는 먹먹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겨운 현실이었고, 그 상황을 견디기 위해 책 속 상상의 세계에 빠진 오필리아라는 작은 아이가 어느새 충분히 나이 들어버린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녹록지 않은 역사적 현실을 아름다운 판타지로 버무려 관객 앞에 내어놓은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행간의 의미를 정확히 짚을 순 없지만, 역사적 사실을 크게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그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한 것 같다.
에필로그....
비달은 역사에서 잊혔다. ...그 밖에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자기 행복을 희생하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았던 사람들 모두가 잊혔다. 스페인은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프랑코 정권의 지배를 받았다.연합군은 새로운 적으로 부상한 소련과 싸우는 데 스페인 반란군이 유용한 동맹 세력이 못 된다고 판단해 끝내 그들을 배신했다.
***중략***
그렇게 모아나 공주는 아버지의 왕국으로 돌아갔고, 오랜 세월 공정하고 자애롭게 나라를 다스리며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 모아나가 지상에 다녀가면서 남긴 작은 자취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