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드
니치 향수. 리치(rich)가 아니라 니치(niche)다. 이탈리아어 니치아 nicchia에서 유래한 말로 틈새라는 뜻의 영어 단어이다. 대량 생산되는 제품이 아닌, 소수를 위한 차별화된 향. (뭐 실제로 비싸서 ‘rich’하기도 하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가장 높은 욕구를 ‘자아실현’이라 했다. 타인의 시선을 넘어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특히 향수는 단순히 내 코에만 좋은 게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를 드러내는 은밀한 언어이기에 니치향수는 자연스레 먹힐 수밖에 없다. 물론 요즘은 니치 향수 브랜드가 우후죽순 생겨나 과연 이게 차별화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승우 : 반갑습니다. 혹시 향수 크리드 쓰세요?
여자 손님: 어…. 어떻게 알았어요?
승우 : 크리드가 원래 향이 세잖아~
2008년 영화 비스티보이스에 나온 이 대사 하나로 크리드는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극 중 승우는 청담동 No.1 호스트이다. 우리나라 최고 럭셔리 동네에 산다는 사모님들도 크리드를 쓴다. 크리드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게 2003년이니 오래지 않아 크리드는 당시 대표 니치 향수가 되었다.
크리드는 무려 1781년 우리나라 정조 시기에 탄생했다. 설립자인 제임스 헨리 크리드부터 지금의 어윈 크리드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이어진 가족경영이다. 바틀에 새겨진 문양부터가 누가 봐도 귀족이다. 처음에는 오직 개인 맞춤으로만 제작하다가 나중에야 대중에게 판매되기 시작한 진정한 의미의 ‘니치’브랜드라 할 수 있겠다. 가격은 100ml 기준 40만 원이 넘고 고가 라인은 80만 원에 육박하니 아무리 향에 도른 나라지만 나도 익스클루시브 라인은 매번 시향에 그치곤 한다.
크리드 시그니처는 단연 어벤투스다. 명실상부 성공의 아이콘인 나폴레옹을 오마주한 향이라니, 역시 부내는 누구한테나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걸까. 남녀 통틀어 어벤투스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파인애플, 베르가못, 사과 등의 시트러스 함이 시원하게 포문을 열고 뒤로 갈수록 우디함이 깊어지며 앰버 그리스의 부드러운 따스함이 남는다. 흔한 아저씨 스킨 냄새가 아닌 아주 세련되고 현대적인 남자의 향이다. 수트 발이 제법 사는 성공한 30대 남자가 한 팔 엔 부잣집 도련님처럼 차려 입은 아들 내미를 번쩍 들어 올린 모습.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성공한 성숙한 남자가 그려진다.
크리드에는 이 외에도 실버마운틴워터, 밀레지움 임페리얼, 오리지널 베티버 등등 매력적인 향이 너무 많지만, 이 주제에 가장 적합한 건 ‘Royal Water’아닐까 싶다. 이름부터가 왕족이듯 잔향에 부내가 솔솔 이다. 원래 명품 하나 없이도 부티가 나야 찐 부자라 했듯이 세상 산뜻하고 담백한 향이다. 기포 잔잔한 고급 탄산수에 레몬과 바질을 띄운 듯한 청량함. 시간이 지날수록 끈적임 없는 레몬 보디로션을 바른 듯 피부에 감긴다. 이런 류의 향은 보통 지속력이 매우 짧은데 이 아이는 은근히 오래간다. 마름 탄탄 근육에 하얀 셔츠, 댄디한 헤어 스타일, 깨끗한 손톱, 청량한 미소. 그런 남자가 떠오른다. 그런 남자는 이성에게 인기가 많아서 인지 여성들도 많이 찾는 향수이다.
물론, 좋은 향수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향기가 주는 무드를 즐기다 보면 어느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를 자꾸 이끌다 보면 그렇게 되어 있겠지. 인생은 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