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미술관 & 칼바도스
미술관에 가면 가끔 상상한다. 이 작품에 어디에 있으면 좋을까? 작품이 녹아들 수 없는 죽어 있는 전시실 공간이 아니라, 그 작품이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장소라면?
권진규의 손은 거대한 건설회사의 입구 중앙에.
김봉태의 창문 시리즈는 색종이 회사 입구에.
김창렬의 물방울은 유리창 너머 햇살 가득한 온실 까페에.
옥승철의 프로토 타입 시리즈는 세상 힙한 카페 벽면에.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은 내 다실에 걸려 있었으면.
이렇게 은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어느새 전시는 끝나 있다. 대학원 시절 몇 년 사이에 평생 다닐 뮤지엄을 다 돈 것 같다. 그래도 그중 가장 발걸음이 잦은 곳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알쏭달쏭한 현대미술을 본 뒤, 한국적인 주변 거리를 걷다 보면 내가 미학적인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힙한 팝업들 사이로 오래된 기와집이 보이고 뷰가 좋은 카페에 앉아 옛 대감댁 지붕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왠지 고고해지는 느낌이다. 역시 무릇 사람이란 이 땅에 났으면 사대문 안에 살아야 하는 건가.
그 동네는 다실도, 바도 많아서 으레 전시를 보고 나면 방앗간처럼 들리는 곳이 있다. 흔치 않게 낮부터 문을 여는 바라서 낮술로 딱이다.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게 낮술이건만, 전시로 머리를 채우고 낮술로 마음까지 채우면 그 얼마나 풍만하겠는가.
오늘은 가을 기운이 낭낭하니 사과 브랜디인 칼바도스 한잔으로 시작한다. ‘오늘도 전시보고 왔어요?’라고 알은 채를 하는 바텐더 덕에 헛헛함도 조금 가신다. 가족들과 떨어져 타향살이를 오래 하다 보면 참새 방앗간이 여럿이어야 마음이 풍요롭다. 적적할 틈을 주지 않는 그 방앗간들 덕에 이번 주 업무 스트레스도 조금 풀이 죽는다.
칼바도스 : 프랑스 칼바도스 지역에서 생산되는 사과 브랜디이다. 가끔 배를 섞어서 만들기도 한다. 꼬냑, 아르마냑, 칼바도스 모두 낭낭한 에어링이 필수 이다. 가끔 뚜따해서 마셨다가 '으, 이게 뭐야.' 하고 실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끔 도저히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병안에 사과가 통으로 들어간 경우도 있다. 작은 열매에 병을 씌워 기르다가 수확한 뒤 칼바도스를 붓는 방식이다. 칼바도스는 꼬냑이나 위스키보다는 가격대가 저렴한 편이지만 국내에 다양한 종류가 들어오지 않아 접하기 어렵기도 하다. 이왕 첫 시도라면 퀄리티 있는 것으로 경험해야 앞으로도 쭈욱 칼바도스를 가까이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