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막걸리 로드

청춘과 막걸리

by 반야심경

억압의 스무 해가 지나 성년이 되면 알콜, 연애(나는 미성년 시절에 연애하면 큰일나는 줄 아는 유교 걸이었다)처럼 그간 금기시되었던 것들이 봇물터지듯 한 번에 쏟아진다. 성년 생일이 지나면 단지 하루 차이로 모든 게 다 되는 이상한 시기. 분유만 먹다가 이유식이라는 신세계에 정신이 혼미한 신생아 마냥 모든 것에 도파민이 터진다. 적어도 나 때는 대학생의 낭만은 소주와 막걸리로부터 시작되었다. 가난한 학생들의 정신줄을 쏙 빼놓는 데는 저렴한 소주와 막걸리가 제격인 것이다. 대학가 앞 전통주점에서 비워지는 놋 주전자 수만큼 에피소드도 쌓여간다.


막걸리 숙취가 심한 나는 평소에 잘 즐기지는 않지만 국내 여행만큼은 항상 막걸리와 함께 이다. 도락 중 최고는 식도락이듯 그 지역 먹거리와 그 지역 술을 함께 해야 비로소 여행이 완성된다. 여행지 오일장에서 특산물 먹거리 산 뒤 하나로 마트에 들러 그 동네에서만 나오는 막걸리를 두어 병 산다. 숙소에서 여행 메이트와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두런두런 그 여행을 마무리한다. 요새는 유통망이 잘 되어 있어 시골 생막걸리도 서울에서 사먹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어려웠다. 여행 와서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낭만적 행위 하나가 그 지역 토속 생막걸리 마시기 였던 것이다.


방학마다 우리 가족은 시골 주말 농장에 갔었다. 아빠는 행여 자식들 몸에 안 좋을까 마당 잔디에 농약 한번 뿌리지 않았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에게 부모님은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으셨나 보다. 더운 여름, 마당에서 오빠와 내가 물놀이를 하는 동안 엄마는 가마솥에 수육을 삶아내고 아빠는 텃밭에서 직접 기른 상추, 고추를 따셨다. 가만 보면 울 엄마 아빠 참 낭만 있었어. 고기를 그냥 먹을 순 없지. 먹을 준비가 다 되면 부모님은 나랑 오빠에게 술 심부름을 시켰다. 민증 검사 이런 게 무어 필요하랴. 뒷동네 구사장님댁 애기들인지 뻔히 아는데. 심부름으로 동동주를 사서 돌아가는 길에 몰래 마신 그 한 모금이 이제껏 먹어본 것 중 최고였다. 예전에는 시골 동네 마을마다 주조장이 있어서 그 자리에서 주전자나 약수터 물통에 담아 주기도 했었다. 지금처럼 현대화되지 않아 갈때마다 맛이 들쑥 날쑥 했지만 또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만약 시골 마트에 갔는데 막걸리 종류가 너무 많아 못 고르겠다면 최신자 유통기한이 가장 많은 것으로 고르면 된다. 그만큼 로컬에서 회전율이 높은 인기품목이라는 뜻이다. 멋모르는 사람들이 제주도에 가면 우도 땅콩막걸리나 감귤 막걸리를 마신다. 아니다. 분홍색 라벨의 생막걸리여야 한다. 영월에서는 동강막걸리나 치악산막걸리에 서부시장 일미 닭강정. 가평에서는 잣막걸리에 골뱅이 무침. 괴산 세종 찰옥수수 막걸리는 두부부침. 담양 달달한 대대포 막걸리는 매운 김치찜. 김포는… 그리고 또 문경은…. 이러다 밤이 새지.


이미지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화, 금 연재
이전 13화나의 참새 방앗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