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첫 루틴

죽고 못 살 커피

by 반야심경

아침잠이 많은 나는 하루 시작을 커피와 함께 한다. 미지근한 물 한 잔으로 몸을 깨우고 커피물을 올린다. 매번 주문하는 전광수 커피하우스의 예가체프. 계량은 하지 않아도 눈대중으로 알 수 있는 원두20g 정도. 내 드리퍼와 원두에 딱 맞춰 둔 그라인더의 굵기. 포트에 손을 살짝 대보았을 때 ‘앗! 뜨거!’가 아닌 ‘으. 뜨뜨...’정도의 물 온도. 베니스 산 비달 교회에서 비발디의 사계만2천번쯤 연주한 실내악단처럼 능숙하게, 그렇게 나는 매일 모닝 커피를 내린다.


커피 한잔이 속을 살짝 훑어내야 비로소 무언가 할 준비가 된다. 모닝 커피, 오후3시쯤 차 한잔, 퇴근 후 주4회 웨이트와 필라테스, 그리고 주말 대청소. 이런 루틴들이 쌓여 하루가 되고, 한 주가 되고, 계절이 된다.


지금은 익숙하고 단단한 이 생활이 사실은4~5년 전쯤 큰 무기력의 터널을 지나며 얻게 된 것이다. 직장인10년차 무렵, 코로나와 함께 심각한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원래 수면 장애가 있던 내가 초저녁부터 병든 닭 마냥 졸음이 쏟아졌다. 이 상황을 이겨낼 힘이 없으니 스스로 스위치를 꺼버리는 듯했다. ‘죽고 싶다’ 까진 아니지만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석 달쯤 지났을까? 나름 자정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믿었건만 그 때만큼은 내 힘만으로는 어림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결국 생애 처음 으로 병원을 찾았고, 긴 검사 끝에 받은 진단은 중증 우울증이었다. 뚜렷한 원인보다는 그간 쌓이고 쌓인 자잘한 시련들이 한 번에 무너져 내린 결과였다. 병원에서는 흔히 그러하듯 약과 함께 햇볕 쬐기, 운동과 같은 전형적인 처방을 내렸다. 내원 후 돌아오면서 한번은 질질 짜고, 또 한 번은 ‘저 돌팔이 보러 이제 가나 봐라’ 를 반복했다. 한번 가라앉은 나의 상태는 수면 위로 쉬이 올라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언가를 해낼 힘 자체가 없었다. 그렇게 몇 달 정도 지나고 나서야 약을 끊어도 되겠다 싶었고, 약간의 틈만 있으면 무기력해지기에 그럴 참이 없는 루틴을 만들어야 했다. 김연아 선수가 ‘그렇게 운동할 때 무슨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생각은 무슨. 그냥 하는 거지.’라고 답한 것처럼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자동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일상에 심어두었다. 그렇게 힘겹게 띄운 내 마음의 돛단배는 다행히 아직 항해 중이다. 어쩌면 살아가는 동안에 앞으로도 종종 배가 가라앉진 않을까 종종거릴 듯하다. 틀어짐 없는 모닝 커피 한 잔이 내일을 위한 돛이 되어줄 지도 모르지.


사진: UnsplashBRUNO CER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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