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과 비교 속에서 흔들린 정체성
올 해로 25살이 됐다.
나는 작년 한 해 동안 특정 대학생 사업단의 학생회장 역할을 맡았다.
내가 맡은 사업단은 다음과 같은 수직적 구조로 운영됐다.
<조직 운영도>
교수님 4분
ㅣ
조교님
ㅣ
학생회장 (나)
ㅣ
부회장 3명
ㅣ
학생 (35명)
INFP, 일 못하기로 유명한 내향인인 내가 어쩌다가 이런 역할을 맡게 되었을까?
사건의 경과는 이러하다.
사업단의 발대식이 끝나고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교수님이 나를 부르더니 잠깐 대화를 하자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 반듯하게 정돈된 사무실의 매우 사무적인 원형 책상에
교수님과 마주 앉았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씀하셨다. (굉장히 억지스러운 미소였다.)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네가 회장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네?”
“네?.. “
“사업단 발대식 회식 날, OOO, OOO 학생에게 물어봤는데 네가 나이도 많고
사교성도 좋아서 꼭 했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어때? 한 번 해볼래?”
“교수님, 제안은 너무 감사하지만 저는 솔직하게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알겠어~!”
리더 같은 일? 부담되고 정말 그냥 하기 싫었다.
선거 날, 교수님은 나를 단상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포부 한 마디를 이야기하라고 했다.
이건 뭐…
한숨이 나왔다.
분명 거절 의사를 보였는데 내 의견이 묵살됐다.
그렇게 나는 학생들의 추천으로 의도치 않게 학생 40명의 리더가 되었다.
처음 해본 리더의 역할은 역시 어려웠다.
중학교 2학년에 부반장을 해 본 경험은 있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무 업무, 서류 작성, 사업단 프로그램 기획 등등..
대학교 4학년에 취업 준비, 밀린 학점, 알바로 인해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사업단의 부대 업무를 수행하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그렇게 6개월이 흐르고 어느 정도 일이 몸에 익었다.
역시 그냥 하면 되긴 되는구나.
많은 시간을 사업단에 쓰다 보니 내 삶은 어느덧 사라졌고 많이 피폐해졌다.
‘좋은 경험이 될 거다. 조금만 더 버티자. 조금만 더 견디자.’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 자신에게 조금의 위안을 건넸다.
순조롭게 흘러갔으면 좋았을 것만
어느 날, 같이 일하던 부본부장 한 명과 트러블이 생겼다.
나보다 3살 어린 이 친구는 자기표현을 워낙 잘하고
할 말을 다 하는 성격이었다.
이 친구와 다른 친구들과의 갈등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선을 넘나드는 아찔한 화법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내가 어려워하는 유형의 친구라고 느낀 기억이 있다.
제발 나와 갈등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는데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역시나 생겨버렸다.
이 친구에 대해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솔직함을 빙자한 무례한 인간
대뜸 없이 그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선배는 하는 일이 왜 이렇게 없어요?”
“내가 무슨 하는 일이 없어~? “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으나
허막한 분위기가 싫어 능글맞게 대답했다.
그 친구가 목소리를 올리며 말했다.
“뒤에서 선배에 대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꽁 상 받고 하는 거 없고 책임감 없다고 이야기가 막 들리더라고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귓 방망이를 한 대 쌔게 맞은 느낌이었다.
나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솔직한 MZ, 아니 그냥 미친년이었다.
눈을 절대로 피하지 않는 독기 있는 그 친구의 눈빛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 너 지금 싸우자는 거냐? 어떻게 말할 때 그렇게 생각 없이 이야기하니? “
아 찐따 같았다.
대답을 하고 나의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과 지질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나의 꺾인 기세를 파악하고 그곳을 더욱더 쌔게 물어뜯었다.
“선배랑 같이 일하면 그냥 무력해요.
리더라는 사람이 힘도 없고 결단력도 없어. 하는 일도 없고 희생정신도 없고.
이제는 포기하겠습니다. 그냥. 아무 말도 안 할게요.”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 이후로 나는 그 친구와 마주해도 인사를 하지 않았고 무시했다.
교수님과의 회의, 부대 행사에서도 그냥 무시했다.
이 정도의 충격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대할 수가 있을까?
어린 친구여서 그런 거야. 이해하려고 해 봤지만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씩 나의 주관이 흐려졌다.
의심이 됐다.
내가 가벼운 사람인가.
내가 일을 못하는 사람인가.
내가 부족한 사람인가.
나는 남들보다 뒤처지는 사람인가.
조금씩 확고했던 내면에 균열이 더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남들보다 정말 부족한 사람이 아닐까?
주변의 눈빛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른 친구도 다 알고 있을까 봐.
그런 소문이 다 퍼졌을까 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의심이 더욱더 커진다.
시간이 흐르고 모든 활동이 끝이 났다.
주변의 눈빛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모두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다.
안도감이 들었다.
“모두 한 해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시원하기만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증오스러웠다.
이렇게 끝날 일이었는데 이 따위의 일에
밤잠을 설치고 괴로워했던 지난 시간들이 증오스러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아무런 소속이 사라졌다.
왜일까.
모든 일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불안하고 조마조마함만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