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밍을 시작한 후로 오늘이 제일 재밌고 행복했어!

왕초보에서 그냥 초보로 진화한 9개월 동안의 클라이밍 기록

by 씩씩한 클라이머


1.

연초에 호기롭게 집 근처 클라이밍장에서 체험 강습을 받고 와서 전완근 근육통 때문에 수저도 제대로 들지 못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9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세 분의 강사님을 비롯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위시 리스트에 적어뒀던 클라이밍장을 대부분 가봤고, 글로 하나하나 적기 힘들 만큼 즐거운 경험을 많이 했다.


문제 푸는 법을 몇 번 물어보면서 수다를 떨다가 조금 친해진 집 근처 클라이밍장 직원분께는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마다 자랑을 했었는데 드디어 훅을 배웠다고 자랑했을 때는 아무 데나 훅을 걸면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따뜻한 조언도 들었다(요즘은 뵙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혼자 볼더링을 하러 다니던 시기에 유익한 조언을 많이 해주시고 문제 푸는 것도 봐주셔서 특히 감사하게 생각하는 분이다!). 같은 문제를 풀던 분과 서로 홀드 브러시질을 해주면서 수다를 떨다가 다음에 같이 운동을 하자고 연락처를 교환하기도 했고, 크루에 들어오라는 제안도 받아봤고, 문제 스타트를 못해서 쩔쩔 매고 있을 때 쓱 나타나서 무심하게 스타트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가는 고마운 분들도 만났고, 여러 번 같은 구간에서 실패했던 문제를 결국 완등했을 때 뒤에서 나이스를 외쳐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한 번은 조금 불안한 자세로 탑 홀드에 손을 뻗으려다 손이 미끄러질 뻔했는데 아래에서 누가 "아이고..."라고 하는 게 들렸다. 다행히 떨어지지는 않아서 자세를 안정적으로 고치고 탑 홀드에 합손을 했더니 같은 분이 크게 "나이스!"라고 외쳐주셨던 기억이 난다.


2.

첫 번째 강사님은 내 왕초보 시절을 함께 해주신 분인데, 대부분의 기본기를 이 강사님께 배웠다. 두 달 동안 손이 먼저 나가고 나간 손을 기준으로 삼지점을 만들 수 있게 발 정리를 해야 한다는 걸 제대로 이해를 못 해서 "발 정리 안 하려고 발을 이만~큼씩 보낸다"는 잔소리(는 아니고 타당한 지적!)도 들었지만 내가 같은 실수를 여러 번 해도 인내심을 가지고 이미 했던 설명을 반복해 주신 친절한 분이셨다.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몇 달 후에 클라이밍을 처음 해보는 친구와 같이 체험 강습을 듣고 운동을 한 적이 있는데, 떨어질 때 절대 매트에 손을 짚지 말라는 말을 반복해도 떨어질 때마다 반사적으로 손을 짚는 친구에게 나도 모르게 "아니, 손을 짚으면 안 된다니까?!!"라고 약간 언성을 높였다가 문득 나도 예전에 강사님에게 똑같은 짓을 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떨어질 때 나도 모르게 자꾸 매트에 손을 짚게 돼서 "매트에 손 짚으시면 안 돼요"라는 말을 20번은 들은 것 같은데 그 와중에 단 한 번도 나에게 화를 내지 않으신 강사님이 천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랑 똑같은 학생을 가르쳤다면 클라이밍은 그만하고 그냥 다니던 헬스장이나 열심히 다니라고 했을 지도...? 이런 게 바로 거울 치료인가 보다!


어쨌든 첫 번째 강사님께는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 많다. 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벽에서 떨어지는 것도 무서웠는데 떨어질 뻔했을 때마다 강사님이 안 다치게 도와주신 덕분에 안심하고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진 게 아쉽지만 이 분이 내 첫 번째 클라이밍 선생님이셨던 게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두 번째 강사님께는 수업을 몇 번 듣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름대로 쭉쭉 늘던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고 몇 가지 홀드를 잡는 게 너무 힘들어서 속상했던 시기에 따뜻한 말을 해주신 분이라서 기억에 남는다. 수업 후에 다음 수업과 관련된 전달 사항을 듣느라 강사님과 잠시 얘기를 나눴었는데, 몇 달 동안 실력이 제자리라 속상하다고 했더니 "길게 보면 몇 개월은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니 조급해할 필요 없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동안 조급하고 답답했던 마음에 크게 위로가 되는 느낌이라 그런지 집에 가는 길에 괜히 눈물이 핑 돌아서 혼자 훌쩍거렸던 기억이 난다.


세 번째 강사님과는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데,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이다. 항상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고, 부족한 점이나 개선이 필요한 점을 정확히 지적해 주시고, 등반을 잘하면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는 게 참 좋다. 이상하게 등반을 했을 때 지적부터 하시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지를 먼저 물어보셔서 스스로 잘못된 점을 한 번 더 생각을 해보게 해 주시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수업 초반에 이런저런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아직은 그런 걸 배울 때가 아니라고 하셔서 조금 섭섭했던 적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는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하게 됐다. 그레이드가 오르고 나니 내가 배우고 싶었던 기술을 배운 것보다 강사님이 원하시는 대로 지구력과 그립 & 파워 트레이닝을 열심히 한 게 훨씬 더 도움이 됐고, 지금보다 더 높은 그레이드의 문제를 풀기에는 그립과 파워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나 스스로도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강사님께서는 초보자일수록 발보다 손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지만 손이 아니라 발에 더 집중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좋은 위치에 조용히 발을 디뎌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편인데, 수업 중에 등반을 할 때마다 발에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예전에 비하면 발을 훨씬 잘 쓰게 됐고 발을 제대로 안 디뎌서 발이 터지는( = 홀드에서 발이 미끄러지는) 상황도 많이 줄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배우고 싶었던 기술도 가르쳐 주셨다. 혼자 할 때는 아무리 해도 안 됐었는데 강사님의 조언을 들으면서 차근차근 시도해 보니 몇 번만에 성공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3.

나는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라 살면서 병원에 갈 일이 많지 않았는데, 클라이밍을 시작하고 난 뒤로 정형외과 단골이 됐다. 오죽하면 몇 달 만에 집 근처 정형외과에 갔더니 원장님이 나를 보자마자 "아직도 클라이밍하세요?"라고 물어보셨을까... 사실 아직까지 골절 같은 큰 부상을 당한 적은 없지만 클라이밍과 다른 운동을 병행하면서 너무 운동을 열심히 했더니 허벅지 힘줄에 염증이 생겨서 한동안 고생을 했었다.

최근에는 다이내믹 무브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손목 힘줄에 염증이 생겼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왼손 중지랑 약지가 잘 굽혀지지 않아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병원에 간 김에 물어보니 방아쇠 수지 증후군이라고 했다. 절대 웃을 일이 아니기는 한데, 운동을 좀 열심히 했다고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질환(?)을 겪는 상황이 조금 웃기기도 하다.


그리고 등반 중에 홀드에 긁혀서 팔과 손에도 흉터가 좀 생겼는데, 홀드에 긁힌 상처는 화상처럼 흉터가 남고 잘 없어지지 않는다. 손은 남의 눈에 잘 띄는 부위라 그런지 부모님이나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흉터 얘기를 한 번씩 꼭 듣는데, 나는 손의 기능에만 큰 이상이 없으면 흉터가 좀 생기는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다.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뭐!


여기저기 다치고 손도 안 예뻐지는데 왜 클라이밍을 계속하냐는 질문을 몇 번 받았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클라이밍이 너무 좋으니까!

4.

3x년 동안 해본 적도 없다가 이제 겨우 9개월 한 운동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아서 계속하게 되는 건지 궁금해서 가끔 혼자 생각을 해봤는데, 나는 어려운 문제를 결국 완등했을 때의 성취감이 좋고, 전에는 잡지도 못했던 홀드를 잡을 수 있게 됐을 때나 어렵다고 생각했던 동작이 어느 순간 수월해졌을 때의 뿌듯함이 좋고, 클라이밍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 같다. 모르는 사이인데도 누가 완등을 했을 때 "나이스!"를 외쳐주고, 여러 번 트라이하던 문제에 실패하면 자기 일처럼 아쉬워하고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는 다정한 분들이 많아서 그런 걸까?


지금은 자세나 동작을 고치려고 등반 영상을 찍고 수시로 보지만 예전에는 영상을 찍지 않아서 등반 영상이 하나도 없었는데, 처음으로 가지게 된 내 등반 영상도 같은 문제를 풀던 모르는 분이 찍어주신 거였다! 어떨 때는 내가 그날 풀었던 문제보다 클라이밍장에서 만났던 좋은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기도 했다.


클라이밍을 시작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누가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고르기 힘들 정도로 즐겁고 보람찬 순간이 많았다. 클라이밍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 클라이밍을 시작한 후로 오늘이 제일 재밌고 행복했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종종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걸 보면 내 지난 9개월은 행복한 순간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물론 강사님들이 열심히 가르쳐주시는 만큼 나도 잘하고 싶은데 생각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속상한 날도 있고, 수업 때 하는 트레이닝이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내가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고, 여기저기 긁히고 부딪히고 굳은살이 뜯어지는 것도 솔직히 아프고, 벽이 너무 높은 클라이밍장에 가면 아직도 조금 무섭지만 그래도 나는 오래오래 클라이밍을 좋아할 것 같다.


올해 느꼈던 감정과 소중한 추억들을 마음 한편에 고이 간직해 뒀다가
언젠가 그레이드도 오르지 않고 실력도 제자리라 지쳐서
클라이밍을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면 다시 꺼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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