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을 견디는 뿌리,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정표

들꽃이면 충분하다. 고향집에는 늘 따뜻한 향기가 머문다

by 최순옥
프롤로그- 봄 그리고 기다림

삶은 때로 며칠 사이에 모든 희로애락을 한꺼번에 밀어 넣는다.

사무실을 감싸는 서늘한 긴장감, 친구의 슬픔, 그리고 점점 작아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까지.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내가 붙잡은 건, 결국 사람의 온기와 글이었다.


3월 26일 (목): 작가의 문장으로 피어난 활력

야근의 정적을 깨고 들려온, 청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키다리 주무관의 목소리. 그 한마디는 삭막한 공간에 난 뜻밖의 창문 같았다.


"언니, 브런치 작가님 글솜씨로 우리 조카 민석이 응원글 좀 써줘! 우리 애 월드 스타 될 거거든."


서류 더미 속에서 잠시 행정가의 옷을 벗고, 작가의 시선으로 아이의 미래를 그렸다. 운동장을 하나의 캔버스처럼 누비는 민석의 발끝을 떠올리며 문장을 고르는 동안, 짓눌렸던 업무의 무게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군가의 꿈을 응원하는 일은, 결국 나를 향한 가장 따뜻한 위로였다.


3월 27일 (금): ‘동그라미’의 미소와 대표님의 지혜

사무실에 예상치 못한 무게가 내려앉던 날, 내 곁에는 늘 ‘동그라미’ 같은 사람이 있었다. 모난 상황을 둥글게 감싸 안는 그녀의 미소는, 날 선 긴장을 풀어주는 쉼표였다.


이날은 화해위원회 강 대표님께서 인천에서 걸음 해주신 날이었다. ‘동그라미’ 주무관과 셋이 마주 앉아 온기를 나누었고, 주무관은 선약으로 먼저 자리를 일어났다.

이후 밤 9시 40분까지 이어진 대표님과의 대화. 그 시간은 길을 잃고 서 있던 나에게 하나의 방향이 되어주었다.

“때로는 멈춰 서서,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지요.”

말씀은 조급했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혔다. 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대표님, 오늘 늦은 시간까지 귀한 말씀 나눠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돌아가시는 길, 오늘의 대화만큼이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곧 도착한 답장은 따뜻했다.


“순옥 선생님!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고운 마음을 지니셨으니 늘 사랑받으시는 겁니다. 스스로를 더 아끼고 공감하시길 바랍니다.”

“따뜻한 향기 속에 마음이 머물다 간다”

그 문장을 오래 곱씹었다.

그리고 ‘사실-느낌-욕구-부탁’의 흐름으로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원망 대신, 해결을 택하기로 했다.


비폭력대화 — 서로 기린 대어주기

먼저 사실을 바라보고, 상대의 느낌을 알아차리려 한다.

그리고 내 마음도 솔직하게 들여다본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다.

이 일이 원망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

서로를 향한 감정이 쌓이기보다, 문제는 문제로서 해결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부탁에 앞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부터 찾으려 한다.

관련 서류를 다시 차분히 살펴보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그리고 가능하다면, 서로에게 무리가 되지 않는 좋은 방법을 함께 찾아가고 싶다.



3월 28일 (토): 군번‘99--’ 번 군번과 아버지의 야윈 손

몸살 기운에 담까지 겹쳐 몸은 무거웠지만,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을 미룰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이마에 손수건을 얹고 누워 계시다가도 내 기척이 들리면 바스락거리는 손을 들어 보이셨다.


기억은 흐릿해져 가도 시골집 대추나무 여섯 그루와 군번 ‘99--’로 시작하는 숫자는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거 잊으면 죽는다.”


짧은 그 말속에 아버지의 평생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야윈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 군밤 때려봐요.”

장난처럼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아버지는 슬그머니 밀어내시더니, 이내 “고맙다, 고맙다”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아버지 반지 몇 돈 있는지 아세요?

바로 다섯 돈이다.

“금반지 다섯 돈… 너 예쁜 반지로 만들어 끼고 다녀라. 막내, 그거 아버지 선물이다.”


당신의 아픔보다 딸을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 앞에서, 일상의 무게는 조용히 내려앉았다.


3월 29일 (일): 냉이꽃 위로 피어난 작은 위로

친구의 모친상 소식을 듣고 조문을 다녀왔다. 말보다 손을 잡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이제는 편히 쉬실 거야.”

짧은 말과 함께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골집 마당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하얀 냉이꽃이 점점이 피어 있었다. 척박한 땅을 뚫고 올라온 작은 꽃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함께 걸을 그 길에도 곧 이 꽃들이 피어나기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에필로그

며칠 사이 많은 일이 지나갔다. 사무실의 언어는 여전히 단단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보다 더 따뜻했다.

아버지는 점점 작아지셨지만, 그 사랑만큼은 줄어들지 않았다.


마당에 새순 그리고 이름모를 풀꽃들 냉이꽇.....


마당 구석의 냉이꽃처럼 우리는 그렇게 버티며 살아간다. 그리고 결국, 피어난다.

“꼭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 들꽃이 더 행복하다. 고향집은 늘 따뜻한 향기가 난다.”


작가님의 말

당황스러운 상황을 ‘사실-느낌-욕구-부탁’의 흐름으로 바라보았다. 문제는 해결해야 할 일이 되었고, 사람은 끝내 위로가 되었다.

서류 속에서 길을 찾고, 사람에게서 힘을 얻고, 아버지의 손에서 삶을 배운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 냉이꽃이 피어난다. 나의 봄도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


다음 편 예고

멈춰 서는 법을 배웠다 생각했는데, 삶은 다시 나를 흔든다.

서류 속에서 풀리지 않던 문제, 예상치 못한 선택의 기로, 그리고 다시 마주하는 사람의 마음.


흔들림 속에서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아버지의 시간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