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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와 밥당번의 하루

연천 들녘에 피어난 여름의 첫 숨결

by 최순옥
프롤로그 — 들녘의 아침, 여름이 시작되는 소리

연천의 새벽 공기에는 물비린내와 풀냄새가 함께 떠다녔다.

산 너머 햇살이 들판을 스며들자, 논마다 은빛 물결이 부르르 떨며 반짝였다.

졸졸 흐르는 개울물은 모판 밑을 적시며 잔잔한 소리를 냈고, 이슬 맺힌 풀잎들이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아버지는 장화를 꺼내 신으며 말없이 논을 바라보셨다.

“오늘은 모내기다. 여름이 시작되는 날이지.”

그 한마디에 들판이 숨을 고른 듯했다.

삽자루를 쥔 아버지의 손에는 흙과 햇살, 그리고 지난 세월의 무게가 함께 배어 있었다.

그 손끝에서 언제나 계절이 다시 피어나곤 했다.


논두렁의 아이논물 속에서는 거머리가 꿈틀거렸다.

나는 그것이 너무 무서워 논에 들어갈 수 없었다.

“야, 들어와 봐. 물 시원하다!”

오빠가 소리쳤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나는 그냥 모 던질래.”

두 손에 모 한 줌을 쥐고 햇살 반짝이는 논 위로 던지면, 모는 반달처럼 날아 아버지 손끝에 닿았다.

아버지는 말없이 받아 모줄 사이에 심으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이상하게 든든했다.

비록 나는 논 속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내가 던진 모 한 포기에도 여름의 숨결이 닿아 있었다.

물 냄새와 흙냄새, 햇살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푸른 들녘의 꿈


밥당번의 하루

해가 머리 위로 오르면, 어머니는 논둑에 돗자리를 폈다.

보리밥, 열무김치, 풋고추, 된장 한 숟가락.

소박한 냄새가 들판을 가득 채우며 숨 쉬었다.

순옥아, 물 좀 따라줘.”

나는 밥당번이었다.

도시락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나르며, 찬물을 돌렸다.

“아버지, 밥 잡수세요.”

아버지는 흙 묻은 손으로 도시락을 받으셨다.

“이 밥이 제일 맛있다.”

그 말에 마음이 저릿하면서도 따뜻해졌다.

그 순간, 나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보리잎과 먼지 냄새가, 밥 냄새와 섞여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여름의 들판, 그리고 고향집

점심이 지나자 바람이 살랑 불었다.

잠자리가 낮게 날고, 멀리 개울물 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우리 집, 저기 보인다.”

우리집 하얀집

어머니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래, 저 집이 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모내기를 하지.”

나는 하얀 담벼락 너머를 바라봤다.

다래 새순이 돋고, 그 꽃은 흰 눈꽃처럼 피었다.

그 그늘 아래에는 언제나처럼 아버지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의자는 들판의 모든 계절을 기억하는 자리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의자 위에서, 나는 아버지의 숨결과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에필로그 — 의자 위의 저녁빛

해가 저물 무렵, 아버지는 장화를 벗고 의자에 앉으셨다.

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물냄새와 풀향이 섞여 있었다.

나는 옆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거머리 무서워서 못 들어갔어요.”

“괜찮다. 던진 것도 일이다. 다 자기 몫이 있는 거야.”

아버지의 말이 바람처럼 부드럽게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논 위로 노을이 번지고, 그 빛이 아버지의 어깨와 의자 위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그날 저녁, 나는 깨달았다.

가족의 사랑은 흙처럼, 물처럼, 햇살처럼 서로의 자리를 채우며 자란다는 것을.

손끝에서 느껴지는 여름의 숨결과, 밥당번으로 느낀 따뜻함, 아버지의 의자가 담은 시간—모든 것이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다.


작가의 말

모내기철 연천 들판은 언제나 고요하다.

흙과 물, 바람과 사람의 숨결이 한데 섞여 하루가 천천히 익어간다.

논둑 위에 서 있었지만, 그 순간 나는 이미 고향의 한복판에 있었다.

아버지의 손끝, 어머니의 미소, 햇살, 바람, 흙냄새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다음 편 예고

〈아버지의 의자 22편 — 여름 장맛비와 감자꽃〉

장마가 시작된다. 논두렁마다 빗물이 차오르고, 감자꽃이 하얗게 고개를 든다.

아버지는 장화를 다시 신으시고, 어머니는 장맛국을 끓이신다.

아이들은 처마 밑에서 빗방울을 세며 웃는다.

빗소리 사이, 의자는 여전히 마당 한편에 놓여 있다.

그 위에 앉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연천의 여름, 그 비 냄새 속에서 또 한 편의 이야기가 피어난다.

고향집 들녘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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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