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머무는
프롤로그 — 병실에서 마주한 순간
어제 병실에서 아버지를 뵈었다. 장루 수술 자국이 남은 배, 부분 상처와 흠집, 그리고 되새김질하듯 움직이는 입술. 아버지는 때때로 섬망 속에서 “엄마는… 언제 오시냐” 하시며 혼잣말처럼 헤매셨다.
그 말속에는 평생을 함께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담백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아버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 손은 모내기하던 여름날의 아버지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 마음 한편은 아버지의 힘든 시간을 느끼며 저릿하게 울렸다.
아버지의 말과 딸에 대한 바람
“너는… 어디 가든 잘해야 한다. 윗분께 예의 바르고… 사람 귀하게 여겨라.”
아버지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씀하셨다. 늘 듣던 말이지만, 지금은 가슴 깊이 박혀 흔들리지 않는 울림이 되었다.
딸을 늘 자랑으로 여기셨던 아버지는, 언제나 ‘잘해라, 예의 지켜라, 사람답게 살아라’라고만 말씀하셨다.
세상이 아버지를 몰라도 나는 안다. 아버지가 어떤 방식으로 딸을 지켜왔는지, 그 마음이 얼마나 곧고 성실했는지를.
아버지의 시계와 시간
아버지는 늘 숫자가 크게 박힌 별·달 시계를 차셨다.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어긋나자, “안 맞아서 뺏어버렸다.” 하시며 쓸쓸히 웃으셨다.
그 말을 듣자, 들판에서 맞추던 시간,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돌아오던 단단한 리듬이 떠올랐다.
지금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지만, 아버지의 마음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위한 작은 선물
이번 주말, 나는 아버지를 뵈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버지께 드릴 선물은 숫자가 아주 큰 시계와 도톰한 수면잠옷 두 벌이다.
명품은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가끔 비싼 것을 좋아하셨던 기억에 중간 정도 가격으로 골랐다.
시계는 아버지가 늘 차시던 그 큰 숫자가 새겨진 디자인으로, 실용적이면서도 아버지가 편안히 느끼실 수 있는 제품이다.
수면잠옷은 아버지께 편안한 잠자리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 선택했다. 이번 주말, 이 두 가지 선물을 드리면 아버지께서 미소 지으실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딸의 발령과 아버지의 자랑
아버지는 내가 청사로 발령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딸, 큰 데서 일한다. 대단한 자리다.”
집에 올 때마다 잊지 않고 당부하시던 말씀,
“윗분들께 예의 바르게 잘해라. 사람은 예의가 먼저다.”
내가 상을 받거나 누군가 잘 챙겨주면, 아버지는 팔에 힘을 더 주셨다.
“그러면 고구마 좀 갖다 드리고, 들기름도 챙겨라.”
내가 상을 받던 날에는
“그때가… 나는 제일 행복했다.”
하시던 아버지 목소리가 지금도 가슴에서 울린다.
고향집 소식과 딸의 기쁨
나는 고향집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 다래 서리 와서 다 땄어요. 엑기스도 담갔어요. 검정콩 네 개 심은 게 국그릇 두 개나 나왔어요. 정원 상추 다섯 포기도 살아 있어요.”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씀하셨다.
“검정콩은 머리도 안 센다. 단백질 많으니까 많이 먹어라.”
그 말속에는 삶의 경험과 조용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나는 기쁘면서도 마음이 저려왔다. 아버지가 겪는 힘든 시간을 떠올리니, 내 행복 속에도 아버지 마음이 아팠다.
정원에 살아남은 상추 사진을 보여드리자, 아버지는 천천히 웃으셨다.
“저것도… 네가 애쓴 거지.”
짧은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큰 사랑과 위로를 주셨다.
사랑은 오래된 의자처럼
아버지는 누워 계셔도 내게는 여전히 그 ‘아버지의 의자’ 위에 앉아 계신 듯 느껴졌다.
고향집 마당 한편, 한 번도 움직이지 않던 그 의자.
지금 병실의 침대 위에서도 아버지 마음은 그대로 앉아 나를 지켜보고, 나를 믿어주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형태만 달라질 뿐, 늘 같은 방향으로 나를 향해 있다.
에필로그 — 딸의 마음에 남은 자리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저 잘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말해주신 대로 예의 지키고, 사람 귀하게 여기면서… 어디 가든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할게요.”
아버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삶의 마지막까지도 딸을 향해 흐르는 가장 큰 사랑처럼 느껴졌다.
나는 안다. 아버지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서 계속 자란다는 것을.
아버지가 남겨준 자리 하나면, 나는 어떤 계절도 두렵지 않다.
작가의 말
병실에서 마주한 아버지 모습은 힘들고 지쳐도, 섬망 속에서도 그대로였다.
그 손을 잡고 느낀 온기와 눈빛은 세월에도, 병에도 닳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아버지의 의자 앞에서 마음을 다잡는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만 바뀔 뿐.
아버지는 여전히 내 삶의 가장 든든한 등불이다.
예고편 — 딸의 마음에 남은 아버지
병실, 어제 마주한 아버지의 눈빛.
섬망과 힘든 시간 속에서도 딸의 작은 수확과 기쁨을 함께 느끼는 순간,
모든 고통이 잠시 멈춘 듯했다.
아버지가 남긴 사랑은 딸의 삶 속에서 계속 살아 숨 쉬며, 모든 순간을 비추는 빛이 된다.
“내가 잘한 걸까?”
이 질문은 내 마음속에 여전히 떠돌고 있다.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내가 진짜 잘한 건지, 더 잘할 수 있었던 건 아닌지 늘 고민하게 된다.
23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이어가려 한다.
아버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지, 그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며, 내가 정말 아버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추신-아버지가 웃으셨다.
나의 구독자분 숫자가 주는 행복과 기대감
아버지는 브런치 작가가 된 딸을 자랑스러워하셨다.
“브런치 시작한 지 70일 만에 구독자가 245명이에요.”
그렇게 활짝 웃으셨다.
"난 네가 잘되는 게, 네가 행복한 게 너무 좋다."
그 웃음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