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버지의 멈춰버린 시계

병실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머무는

by 최순옥
프롤로그 — 병실에서 마주한 순간

어제 병실에서 아버지를 뵈었다. 장루 수술 자국이 남은 배, 부분 상처와 흠집, 그리고 되새김질하듯 움직이는 입술. 아버지는 때때로 섬망 속에서 “엄마는… 언제 오시냐” 하시며 혼잣말처럼 헤매셨다.

말속에는 평생을 함께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담백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아버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 손은 모내기하던 여름날의 아버지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 마음 한편은 아버지의 힘든 시간을 느끼며 저릿하게 울렸다.


아버지의 말과 딸에 대한 바람

“너는… 어디 가든 잘해야 한다. 윗분께 예의 바르고… 사람 귀하게 여겨라.”

아버지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말씀하셨다. 늘 듣던 말이지만, 지금은 가슴 깊이 박혀 흔들리지 않는 울림이 되었다.

딸을 늘 자랑으로 여기셨던 아버지는, 언제나 ‘잘해라, 예의 지켜라, 사람답게 살아라’라고만 말씀하셨다.

세상이 아버지를 몰라도 나는 안다. 아버지가 어떤 방식으로 딸을 지켜왔는지, 그 마음이 얼마나 곧고 성실했는지를.


아버지의 시계와 시간

아버지는 늘 숫자가 크게 박힌 별·달 시계를 차셨다.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어긋나자, “안 맞아서 뺏어버렸다.” 하시며 쓸쓸히 웃으셨다.

그 말을 듣자, 들판에서 맞추던 시간,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돌아오던 단단한 리듬이 떠올랐다.

지금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지만, 아버지의 마음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위한 작은 선물

이번 주말, 나는 아버지를 뵈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버지께 드릴 선물은 숫자가 아주 큰 시계와 도톰한 수면잠옷 두 벌이다.

명품은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가끔 비싼 것을 좋아하셨던 기억에 중간 정도 가격으로 골랐다.

아버지의 선물 큰 글씨의 명품시계

시계는 아버지가 늘 차시던 그 큰 숫자가 새겨진 디자인으로, 실용적이면서도 아버지가 편안히 느끼실 수 있는 제품이다.

수면잠옷은 아버지께 편안한 잠자리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 선택했다. 이번 주말, 이 두 가지 선물을 드리면 아버지께서 미소 지으실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딸의 발령과 아버지의 자랑

아버지는 내가 청사로 발령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딸, 큰 데서 일한다. 대단한 자리다.”

집에 올 때마다 잊지 않고 당부하시던 말씀,

“윗분들께 예의 바르게 잘해라. 사람은 예의가 먼저다.”

내가 상을 받거나 누군가 잘 챙겨주면, 아버지는 팔에 힘을 더 주셨다.

“그러면 고구마 좀 갖다 드리고, 들기름도 챙겨라.”

내가 상을 받던 날에는

“그때가… 나는 제일 행복했다.”

하시던 아버지 목소리가 지금도 가슴에서 울린다.


고향집 소식과 딸의 기쁨

나는 고향집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 다래 서리 와서 다 땄어요. 엑기스도 담갔어요. 검정콩 네 개 심은 게 국그릇 두 개나 나왔어요. 정원 상추 다섯 포기도 살아 있어요.”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씀하셨다.

“검정콩은 머리도 안 센다. 단백질 많으니까 많이 먹어라.”

말속에는 삶의 경험과 조용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나는 기쁘면서도 마음이 저려왔다. 아버지가 겪는 힘든 시간을 떠올리니, 내 행복 속에도 아버지 마음이 아팠다.

정원에 살아남은 상추 사진을 보여드리자, 아버지는 천천히 웃으셨다.

“저것도… 네가 애쓴 거지.”

짧은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큰 사랑과 위로를 주셨다.

아버지와 나의 시계는 반영된다


사랑은 오래된 의자처럼

아버지는 누워 계셔도 내게는 여전히 그 ‘아버지의 의자’ 위에 앉아 계신 듯 느껴졌다.

고향집 마당 한편, 한 번도 움직이지 않던 그 의자.

지금 병실의 침대 위에서도 아버지 마음은 그대로 앉아 나를 지켜보고, 나를 믿어주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형태만 달라질 뿐, 늘 같은 방향으로 나를 향해 있다.


에필로그 — 딸의 마음에 남은 자리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저 잘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말해주신 대로 예의 지키고, 사람 귀하게 여기면서… 어디 가든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할게요.”

아버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삶의 마지막까지도 딸을 향해 흐르는 가장 큰 사랑처럼 느껴졌다.

나는 안다. 아버지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서 계속 자란다는 것을.

아버지가 남겨준 자리 하나면, 나는 어떤 계절도 두렵지 않다.


작가의 말

병실에서 마주한 아버지 모습은 힘들고 지쳐도, 섬망 속에서도 그대로였다.

그 손을 잡고 느낀 온기와 눈빛은 세월에도, 병에도 닳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아버지의 의자 앞에서 마음을 다잡는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만 바뀔 뿐.

아버지는 여전히 내 삶의 가장 든든한 등불이다.


예고편 — 딸의 마음에 남은 아버지

병실, 어제 마주한 아버지의 눈빛.

섬망과 힘든 시간 속에서도 딸의 작은 수확과 기쁨을 함께 느끼는 순간,

모든 고통이 잠시 멈춘 듯했다.

아버지가 남긴 사랑은 딸의 삶 속에서 계속 살아 숨 쉬며, 모든 순간을 비추는 빛이 된다.

“내가 잘한 걸까?”

나의 고민 방황 어디로 가는걸까?

이 질문은 내 마음속에 여전히 떠돌고 있다.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내가 진짜 잘한 건지, 더 잘할 수 있었던 건 아닌지 늘 고민하게 된다.

23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이어가려 한다.

아버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지, 그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며, 내가 정말 아버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추신-아버지가 웃으셨다.
나의 구독자분 숫자가 주는 행복과 기대감

아버지는 브런치 작가가 된 딸을 자랑스러워하셨다.

“브런치 시작한 지 70일 만에 구독자가 245명이에요.”

그렇게 활짝 웃으셨다.

"난 네가 잘되는 게, 네가 행복한 게 너무 좋다."

그 웃음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keyword
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