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을 지나며, 그리고 오늘
프롤로그 — 긴 겨울이 길을 만든다
2024년의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아버지의 병실 창가에 스며들던 미약한 새벽빛도, 퇴근길마다 들고 들어가던 따뜻한 국 한 그릇도 모두 겨울 속에서 버티고 서 있던 시간이었다.
어머니를 떠나보냈던 날처럼, 이번에도 나는 두려웠다. 혹시 아버지가 그 길을 뒤따르진 않을까, 혹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해 아버지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 무서움과 떨림은 나를 허공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만들었다. 걸음을 옮기면 땅이 꺼질 것만 같아, 하루하루가 낯설고 조심스러웠다.
본문 — 병실의 겨울과 나의 선택
2024. 2월 7일, 장폐색증과 피할 수 없는 장루수술
2월 7일, 장폐색증으로 어쩔 수 없이 스텐트를 넣고 결국 장루수술까지 진행되었다.
수술 직후 아버지는 섬망으로 사흘 동안 낮과 밤을 잃었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나는 정신이 타들어가듯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정신이 무너져 내린다’는 말이 가장 가까운 표현이었다.
섬망이 가라앉은 뒤, 자존심이 강한 아버지는 사흘 동안 말문을 닫으셨다. 조용한 병실 안에서 그 침묵은 더 크게 울렸다.
형제 사이의 의견 충돌과 나의 갈등
대장암 진단이 내려지자 형제들 사이의 의견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고령인데 또 큰 수술을 해야 하냐.”
“장루도 있는데 어떻게 회복하겠냐.”
걱정이 맞부딪히며 작은 균열이 크게 번졌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아버지의 삶의 질과 자존감을 생각했다. 고령의 아버지가 장루를 달고 남은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어떤 선택이 더 나은가를 수백 번 고민했다.
타 병원의 명의를 찾아 상담했고, 기록을 검토한 결과 “수술 중 상황이 되면 장루를 넣어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희망 같았지만, 실제 수술에서는 장루를 넣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대장암 수술 자체는 예후가 좋다고 했다. 그 말 하나가 얼어붙은 겨울 속 작은 온기처럼 느껴졌다.
장루수술 이후 8일간의 병간호, 그리고 아들의 헌신
2월 7일 이후 8일간의 병간호는 하루의 길이와 삶의 무게를 동시에 바꿔놓았다.
그 뒤를 이어 이번에는 군 제대 후 집에 머물던 아들이 병간호를 이어받았다. 아들은 식사, 자리 정리, 약 확인 등 일상적인 병간호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 곁을 지켰다.
아버지가 힘없이 손을 내밀며 “고맙다… 수고한다”라고 말한 순간, 아들의 헌신이 병실의 공기를 바꿨다. 겨울 속 피어난 작은 봄 같았다.
11월 22일, 최근 방문 기록 — 선물과 아버지의 마음
나는 매주 1~2회 아버지를 뵈러 간다.
이번 병문안에는 딸아이와 함께 갔다. 시계와 수면잠옷을 선물로 드렸다.
아버지는 통장, 주민번호, 군번, 통장 비밀번호를 꼼꼼히 확인하시며 말씀하셨다.
“내 재산은 다 우리 막내딸, 네 엄마한테 다 준 거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한마디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떠날 미래를 조금씩 정리하면서도, 우리 가족이 걱정하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챙길 수 있는 모든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딸아이에게 말씀하셨다.
“시험 잘 봤니? 학비 걱정 마. 아르바이트는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해라. 엄마 말도 잘 들어야 한다.”
그러자 나는 아버지께
“딸이 말도 안 듣고 돈만 가져다 쓴다고 했다,
아버지는 패버리리라”
그 한마디에 병실 안에 웃음이 터졌고, 짧지만 깊은 온기가 공간을 채웠다.
손목시계를 채워 드리고, 잠옷을 입히며, 아버지가 편안히 누울 수 있도록 곁을 지켰다.
수건을 따뜻한 물에 데워 아버지의 얼굴과 목, 귀, 손까지 천천히 닦아드렸다.
차갑게 식어 있던 피부가 온기를 머금자, 아버지 표정도 조금씩 풀렸다.
귀지를 조심스레 파드리고, 길게 자란 손톱을 하나하나 다듬어 깎아드렸다.
허옇게 자라난 눈썹도 깔끔하게 정리해 드리니, 아버지는 마치 오래된 시간을 털어낸 듯 조금 젊어진 얼굴이 되었다.
그 뒤로는 딸아이가 이어받았다.
수분 크림을 손바닥에 가득 짜 올려 아버지의 얼굴과 손등에 톡톡 두드리며 스며들게 했다.
토닥토닥, 손바닥의 온기가 아버지 피부에 내려앉는 동안
딸아이는 아버지의 마른 손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며 오래도록 마사지해 드렸다.
아버지는 “시원하다, 개운하다” 하며 작은 숨을 길게 내쉬셨다.
그 순간 아버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아버지 눈빛 사이로 살짝 번져 나오는 것을
나는 오래 기억할 것 같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아버지와 내가 공유한 숨결은 지난 몇 달의 긴 겨울을 조금이나마 녹여주는 따뜻한 순간이었다.
늦겨울 시골집 — 다래나무 아래에서
주말마다 시골집을 찾았다.
아버지가 심어둔 검정콩 네 알은 끝내 잘 자라 수확까지 이어졌다. 아버지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서리가 내려도 살아남은 상추 네 포기.
“이거 고기 싸서 먹어라. 맛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오래 묵은 기운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집은 온통 낙엽이 쌓여 겨울을 견딘 흔적이 가득했다. 차고 앞, 다래나무 아래, 화단의 항아리까지 손길이 닿지 못한 채 멈춘 계절이 보였다.
두 시간을 넘게 낙엽을 쓸고, 물을 뿌리고, 항아리를 닦았다. 다래나무 아래가 비로소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지난 몇 달간 나도 이렇게 낙엽 속에서 길을 찾아왔음을.
에필로그 — “나는 잘한 걸까”라는 질문과 함께
아버지를 살리고 싶어 내린 선택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내 마음은 흔들렸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다른 길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매일 아침과 저녁 아버지를 뵈러 가던 길, 기운 없으신 아버지를 웃게 하려고 보여드리던 작은 ‘원숭이 춤’.
그 한 번의 웃음이 나에게는 정답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끝까지 붙들고 있다는 건 ‘완벽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놓지 않는 것’이라는 걸 이번 겨울이 가르쳐주었다.
나의 고통
2024년 내내 나는 숨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병원과 직장, 집을 오가는 일상이 반복되며, 모임 한 번, 커피 한 잔조차 마음껏 즐기지 못했다.
직장에서는 교수 면담과 업무 압박이 겹쳤고, 병원에서는 아버지를 매주 1~2회 뵙고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주말마다 시골집 방문도 이어졌다. 정신적으로는 늘 조급했고, 마음 한편에는 늘 두려움이 자리했다. 정말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루하루가 공중에 떠 있는 듯 허공을 딛고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버티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미소, 제대 후 병간호를 묵묵히 이어준 아들, 그리고 낙엽 속에서도 강하게 살아남은 상추처럼 작은 생명력 덕분이었다.
숨 가쁜 나날 속에서도, 나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작가의 말
나는 2024년 대부분을 병원과 직장, 집만 오가며 살았다. 모임 한 번, 커피 한 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떠나보냈던 때처럼, 이번에도 아버지가 그 길로 가실까 두려워,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버티게 했던 것은 아버지의 미약한 웃음, 제대 후 묵묵히 병간호를 이어준 아들의 손길, 그리고 낙엽 속에서도 싱싱하게 살아남은 상추 몇 포기 같은 작은 생명력 덕분이었다.
숨 가쁜 나날 속에서, 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이가 드시면서 주간보호센터에서 시간을 보내실 때, 내가 카메라를 들이 밀면 언제나 장난스럽게 포즈를 취해 주셨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다정하고 귀여웠는지, 그때는 그 순간이 영원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장면이 참 그립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는 170cm에 38kg. 가느다란 어깨 위로 콧줄이 걸린 채 누워 계신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나에게는 기록이 아니라 고통이고, 마주해야 하는 슬픔이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그리움이 될까’ 싶으면서도, 차마 화면에 담지 못한 채 마음으로만 꾹 눌러 담는다.
언젠가…
정말 언젠가 다시 웃으시며 포즈를 지어 보이실까.
그 작은 희망 하나가 오늘도 나를 버티게 한다.
다음 편 예고 — 24편 〈집으로 돌아가는 길〉
대장암 수술 이후 아버지의 회복기.
9월, 요양원·요양병원·집 중 어디로 모실지 방황했던 선택의 갈림길, 그리고 아버지가 끝내 “집”을 원하셨던 마음.
그 속에서 깊어진 나의 갈등과 고민, 아버지의 선택을 지켜보며 느낀 책임과 불안, 가족으로서 최선의 길을 찾아야 했던 시간들을 다음 편에서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