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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삶의 터전

한 시간 잠시 머물다

by 최순옥
프롤로그 — “집에 가고 싶다”는 아버지의 마음

“집… 가고 싶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병실의 눅눅한 공기를 천천히 흔들며 흘러나왔다. 느리고 떨리는 숨결이었지만, 그 속에는 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단단한 의지가 있었다. 오래 묵은 바람, 오래 기다리던 기도의 마지막 끝자락처럼 들렸다.

나는 곧바로 교수님께 외출 허락을 요청했다. 허락된 시간은 고작 3시간.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아버지가 숨을 고르고, 고향의 바람을 다시 맞고, 흙냄새를 들이마시기를 바랐다. 그저 잠시라도 “집”이라는 이름의 기억 속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홍가 아저씨 2024.2.25 병실 면회 — 마음의 온기

수술 후 보름여, 2024년 2월 25일.

아버지가 먼저 “홍가 그 사람이 보고 싶다”라고 말씀하신 뒤, 오랜만에 찾아온 귀한 면회였다.

홍가 아저씨는 전복죽 한 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아버지… 요즘은 어떠세요? 많이 힘드신 건 아니죠?”

아버지는 힘겨운 숨 사이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 속에는 “난 아직 괜찮다”는 안도의 눈빛이 있었다.

“아이고… 홍가 그 사람이 왔네.”

그 짧은 한마디에 오래된 인연이 다시 불을 밝혔다.

홍가 아저씨는 침대 옆에 앉아 아버지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 다시 기운 차리셔야죠. 좋은 생각만 하셔야지요.”

말은 짧았지만, 두 사람의 침묵 속에는 말보다 큰 위로와 그리움이 오갔다.

그날 아저씨가 가져온 전복죽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오랜 정과 사람의 마음이 깊게 스며든 온기였다.


노란 버스 위의 여정 — 고향집 이동 (2024.8.13)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하늘은 유난히 밝았다.

바람은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첫 감촉을 함께 실어 나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홍가 아저씨와 함께 동행하도록 사전에 예약하고 부탁드렸다.

익숙한 분과 함께 이동해야 아버지가 마음 놓고 편안히 여정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믿는 노란 장애인 차량.

희망의 노랑버스

그 운전석에는 홍가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늘 “홍가 그 사람”이라 불렀고, 아저씨는 언제나 “아버지”라 답했다.

혈연보다 두터운 마음이 그 짧은 호칭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앞자리에 앉아 멀미를 참으며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뒷자리에서는 손녀가 아버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간병인분은 눈빛과 손길로 아버지를 조심스레 살폈다.

덜컹이는 차 안, 네 사람의 숨결이 서로를 지탱하며 조용한 온기를 만들어냈다.


고향집 도착 후 — 참기름 선물

고향집에 도착하자, 나는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 도지 받아서 짠 참기름 9병 나왔는데, 몇 병 드릴까요?”

아버지는 잠시 눈을 붙여 생각하시더니,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고 말씀하셨다.

“세 병 드려라. 작년에도 참깨 한 말 줬으니, 뭘 줘도 아깝지 않다.”

짧은 말 같지만, 그 안에는 아버지의 평생 방식대로의 감사,

사람에게 베풀고 갚는 도리,

그리고 삶을 대하는 담백한 마음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 마음이 우리 가족과 홍가 아저씨에게 따뜻하게 번져갔다.


고향집 침대에서 — 콧줄로 뉴케어를 드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콧줄로 뉴케어를 천천히 드셨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아버지 얼굴에 부드럽게 걸렸고,

마당의 나무와 화분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아버지 시선에 천천히 담겼다.

간병인분은 옆에서 조심스레 자세를 바꿔 드리고 있었고,

손녀는 손을 살짝 얹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편하게 계세요.”

그리고 자신이 쓰던 푹신하고 납작한 베개를 고이 받쳐 드렸다.

그 한마디, 그 손길 하나에

아버지 얼굴에 작은 힘이 돌았다.

콧줄, 느린 호흡, 손녀의 온기, 간병인의 배려…

그 모든 작은 결이 모여

침대 주변은 오랜만에 고요한 평화로 가득했다.

아버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집안 곳곳을, 마당을, 익숙한 나무와 오래된 화분을 바라보았다.

세 달을 견뎌낸 삶의 무게와

집으로 돌아온 안도감이 그 시선 곳곳에 스며 있었다.


음식 배달과 마음의 연결

아버지는 고마움에 친구가 운영하는 중식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배달시키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콧줄로 음식을 드실 수 없었다.

음식의 향기, 가족의 이야기, 집 안의 온기가

아버지에게도 조용히 스며든 듯했다.

작은 음식 하나, 작은 말 한마디, 작은 손길 하나가

집 안을 채우고

오랜 시간 흩어졌던 가족의 마음을 다시 연결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 — 지친 몸과 가벼운 마음

돌아오는 길, 나는 앞자리에서 멀미를 겨우 참았고

딸아이는 뒤에서 덜컹거림 속에 두통이 시작되어 긴장과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작은 손길 하나가 아버지의 마음도, 우리 마음도 조용히 다독였다.

아버지가 딱 한 번이라도 집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고

고향의 공기를 폐 깊숙이 담아낸 것만으로도

우리 가족에게는 계절 하나를 온전히 살아낸 듯한 기쁨이었다.

아버지에게 전해질 나의 소중한 글


요양원 답사 (2024.8.13)

고향집에 다녀온 뒤,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기 전

홍가 아저씨와 함께 먼저 요양원을 찾아갔다.

홍가 아저씨는 노인 관련 일을 오래 해오신 분이다.

요양원의 냄새, 수건 상태, 직원들의 태도, 입소자들의 표정까지 꼼꼼히 살핀 뒤 말했다.

“아버지, 여기 괜찮아요. 지내시기 좋을 것 같아요. 조금만 몸 회복하자고요.”

아버지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 신뢰는 우리 가족에게도 작은 안도감을 주었다.

아버지의 의자 꽃이피다


요양원 입소 (2024.8.17) — 찢어지는 심정

드디어 17일,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셨다.

입소하는 아버지의 눈을 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나는 손을 잡고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그저 죄송함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아버지는 조용히 침대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셨다.

콧줄과 느린 호흡 속에서도

그 눈빛 속에는 한순간의 불안과 동시에 신뢰가 묻어났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작가의 말 — 희망과 사랑

요양원 생활이 시작되며

아버지는 가벼운 스트레칭과 호흡 운동을 매일 조금씩 시도했다.

그 옆에는 늘 홍가 아저씨, 간병인분, 손녀가 있었다.

“할아버지, 천천히. 괜찮아요.”

그 한마디에 아버지 얼굴에는 작은 힘이 돌았다.

걸음을 한 번 옮길 때마다, 팔을 한 번 들 때마다

우리 마음에도 희망이 한 겹씩 쌓였다.

2024년 내내 우리는 병원과 요양원을 오가며

마음을 한 번도 쉬게 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작은 미소, 손주들의 따뜻한 손길

그리고 시골 텃밭에서 기다리던 상추 몇 포기 덕분이었다.

사랑은 완벽한 선택이 아니었다.

흔들리고 넘어질지라도

끝내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손잡고 거닐던곳 연천 나의 고향


예고편 — 요양원에서의 새로운 시작

아버지는 요양원 침대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셨다.

나는 홍가 아저씨와 함께 다시 방을 둘러보며

아버지가 천천히 몸을 회복할 미래를 마음속에 그렸다.

콧줄, 소변줄, 모든 불편이 제거된 뒤

아버지의 일상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이야기는

요양원에서 아버지가 작은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과

가끔 찾아오는 고비, 그리고 가족의 마음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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