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과 마음, 그리고 아버지
프롤로그 — 마음의 균열과 고향집의 부름
발령 소식이 다시 내 마음을 흔들었다.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이해와 별개로 여전히 무겁다.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마음은 아직 준비가 덜 된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아픈 몸이 조금 나아야 고향집을 살피러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급함과 설렘, 그리고 감당해야 할 부담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몸이 먼저 회복되길 바라면서도, 마음은 이미 고향집으로 향해 있었다.
보일러, 마당, 화초, 냉골이 된 집 안 곳곳….
떠오르는 할 일들은 마음의 무게가 되었고
결정을 미루던 시간만큼 고민의 깊이도 함께 쌓여갔다.
3년 동안 정들었던 직장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도
마음 한편을 묵직하게 채운다.
익숙한 사람들, 반복되던 하루,
아무 생각 없이 지나던 복도와 책상까지도
이제는 하나하나 떠올라 떠날 준비의 무게를 더한다.
본문 — 고향집의 숨결과 하루의 리듬
아버지 뵙고, 고향집으로
딸아이와 함께 아버지를 뵈러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늘 그 자리에 있던 시간처럼 아버지가 계셨다.
그 모습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놓인다.
“할아버지, 제가 오늘은 일등이에요.”
아이는 하트를 날리며 팔씨름을 하자고 한다.
“할아버지 힘이 센데?”
“난 천하장사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 대통령이다.”
“그럼 우리나라 부자 되겠네?”
“그렇지.”
웃음이 오가며 방 안이 한결 밝아진다.
“아버지, 우리 직장 인원이 1,200명이에요.”
“그리 많으냐. 아주 크네. 축하한다.”
“발령 선물 뭐 줄 거예요?”
“꽃 보내줄게.”
“빨간색으로 열 개요.”
“그래, 떡도 보내마.”
오늘의 아버지는
집 주소와 주민등록번호, 군번, 통장 비밀번호까지
하나하나 또렷이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들으며 마음 한편이 든든해지고,
동시에 이 기억을 지켜야 한다는
조용한 책임감도 함께 느낀다.
아버지를 뒤로하고 이제 고향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보일러와 마당, 집 안 곳곳을 점검하고
화초와 냉골이 된 공간들을 살펴야 한다.
환기와 난방, 작은 청소까지—
산더미처럼 느껴지지만
이 모든 과정이 결국
내 마음을 정리하고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108세 어르신과 요양원 이야기
아버지와 방을 쓰시던 108세 어르신은 참 건강하셨다.
일찍 일어나 환기를 시키고
물티슈로 침대 난간을 닦으셨다.
내가 가면 알사탕을 건네주시거나
의자를 가져다주시고
자리를 비우며
“당신 침대에 앉으라”라고 배려하셨다.
색칠공부를 못하는 날에는
직접 색칠한 달력을 붙여주시기도 했다.
그 손길 하나하나에
오랜 시간 쌓인 삶의 태도가 담겨 있었다.
요양원 대표님이 인근 요양원을 인수하며 옮기셨고,
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어르신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져
마음에 작은 아쉬움이 남았다.
공간 속 기억과 회복 보일러 스위치를 켜자
따뜻함이 집 안을 채운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미세한 온기가 조금씩 퍼지며
냉골이던 공간을 부드럽게 감싼다.
시골집의 전기세는 늘 부담이다.
거실과 주방만 켜도 하루 2만 원, 한 달이면 50~60만 원.
전기를 확인하고 나서야 현실이 다시 또렷이 다가온다.
창고에서는 비린 젓갈 냄새가 진동했다.
옆집 아주머니가 부탁해 쓰던 김치냉장고였다.
전기를 뽑고 물을 받아하나하나 닦아내며 냄새를 지운다.
점퍼에 밴 냄새에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럼에도 보일러에서 올라오는 따뜻함과
사랑초 다섯 송이는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하는
작은 힘이 되어준다.
햇살 아래 고개를 든 꽃들.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끝내 피어난 그 모습이
이 집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는 조용한 증거처럼 느껴진다.
마당을 걸으며 눈과 흙, 나무를 살피고 작은 화초를 만지는 시간 속에서 몸과 마음이 함께 깨어난다.
그 순간, 고향집과 다시 연결된 나 자신을 느낀다.
마음과 준비
아픈 몸이 조금 나아지면
나는 새로운 직장으로 발령을 받아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그전에 고향집을 살피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몫이다.
집 안팎을 점검하고 환기와 난방을 챙기며
작은 화초까지 손보는 과정 속에서 마음도 조금씩 정리된다.
떠날 준비 역시 이런 일상의 손길 속에서 천천히 이루어진다.
에필로그 — 하루를 살아내는 작은 기적
오늘도 나는 고향집의 숨결 속에서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과 함께 하루를 살아낸다.
작은 발걸음, 손끝의 움직임, 보일러의 따뜻함과
눈과 화초 속의 온기. 이 모든 것이
하루를 견디게 하는 조용한 기적이 된다.
작가의 말 — 기록의 힘
회복은 거창한 사건에서 오지 않는다.
보일러 하나 켜고 마당을 살피고
작은 화초를 손끝으로 만지는 그런 일상 속에서
삶은 다시 이어진다.
이 기록은 아버지와 나를 이어주는 시간이자
나 자신을 다독이는 방식이다.
예고편 — 앞으로의 일
발령까지 9일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직원들과의 인사와
서류를 마무리하고 새 직장으로 이동할 준비를 한다.
정든 공간과 아쉬움을 안고 고향집과 아버지,
익숙한 일상을 잠시 뒤로하며 2026년 1월 1일,
다시 새로운 하루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