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전야, 인사와 남겨진 온기
프롤로그 — 발령장 앞에서
2025년 12월 24일, 발령장을 받았다.
서류 한 장이지만 그 안에는 이동과 이별, 그리고 시작이 함께 담겨 있었다.
새로운 곳에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향집과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성탄절 전야였다.
이런 날에는 가장 먼저 안부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분명해진다
본문ㅡ아버지께 드린 성탄절 전야 인사
요양원에서, 운동과 약속, 그리고 크리스마스 카드
운동과 약속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찾아뵀다.
“아버지, 운동 좀 하셔야 해요. 그래야 고향집에 모시고 갈 수 있어요.”
아버지는 잠시 듣고 계시다 “그럼 해야지.” 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색칠공부도 열심히 하셔야 해요. 잘하시면 막내딸 그려달라고 할 거예요.”
아버지는 그 말이 마음에 드셨는지
“내가 잘해서 그려달라 그래야지.” 하신다.
성탄절 이야기를 꺼내자 아버지는 뜻밖의 약속을 하나 더 하셨다.
“카드 만들어줄게.”
그 말 한마디가 성탄절 전야를 환하게 밝혔다.
“아버지, 집 보일러는 잘 돌아가요.” 하고 전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하신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아버지에게 중요한 건 카드와 보일러,
그리고 아직 내가 데려갈 고향집이 분명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라는 걸.
소톱으로 다듬고 눈썹을 정리해 드린 뒤,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 드리고
로션으로 마사지하듯 천천히 손길을 옮겼다.
“시원하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안도와 신뢰,
그리고 여전히 살아 있는 감각이 담겨 있었다.
지켜야 하는 이유
요양원 입구에서는 한약 냄새가 진하게 났다.
“원장님, 한약 내리세요?” 하고 묻자
“아뇨, 어르신들께 한방차 드리고 있어요. 매일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잠시 망설이다
“그럼 아버지도 드시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물었다.
원장님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다.
“콧줄 하신 아버님은 삼킴에 어려움이 있어, 기도로 넘어갈 수 있어요.
흡인성 폐렴 염려가 큽니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무언가가 아니라,
지금의 상태를 무사히 건너는 일이었다.
나래 선생님 이야기
아버지께 농담처럼 말했다.
“아버지, 활동 안 하시면 나래 선생님 월급 못 받아요.”
그러자 아버지는 곧바로 말씀하신다.
“내가 줘야지.”
“어떻게요?” 하고 묻자
아버지는 주저 없이 답하신다.
“돈 벌어서 많이 주지.”
순간 웃음이 났다.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할 일이 있고,
책임질 사람이 있고, 벌어야 할 이유가 남아 있었다.
활동은 치료가 아니라
아버지에게는 일이고, 관계이고, 삶 그 자체였다.
나래 선생님을 보며 물었다.
“선생님 얼굴이 빨개요. 더우세요?”
“괜찮아요.”
다시 묻자, “힘들지 않으세요?”
선생님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퇴직 준비는 꼭 아니지만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서
나중에 이 일을 하고 싶은데… 막상 오면 못할 것 같아요.
자꾸 눈물이 나요.”
그리고 덧붙였다.
“전 괜찮은데요, 어르신들이 가끔 떠나실 때…
그때가 제일 마음이 아파요.”
그 말은 일의 무게보다
마음의 깊이를 먼저 보여주고 있었다.
직장에서 남겨진 인사들
발령 후 공식적인 축하 인사는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말들이 전해졌다.
“팀장님, 전근무지에서 처음 뵙고 그때도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늘 친절하게 다정하게 챙겨주셔서 감사했어요.
업무뿐 아니라 마음까지 세심하게 살펴주시고,
어려움이 있으면 먼저 나서 함께 고민해 주셔서 늘 든든했습니다.
덕분에 사람과 일 모두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 다른 메시지는 조금 더 감정이 묻어 있었다.
“팀장님… 이동하시나 봐요. 늘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마음이 참 푸근했는데, 송별회 주인공이 되신다 하니 많이 서운해요. 미모의 팀장님, 가시는 곳에서도 늘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사소한 일도 그냥 넘기지 않고 먼저 살펴 주시고, 힘들 때마다 괜찮다며 따뜻하게 격려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팀장님의 웃음과 배려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고, 함께 일하는 시간이 참 편안했습니다. 새로운 자리에서도 팀장님의 진심과 따뜻함이 많은 분들께 고스란히 전해질 거라 믿습니다.”
떠난다는 말이 퍼진 뒤
2026년 1월 1일 자 발령, 12월 19일 자 공문 시행.
그래서 실감은 더디게 왔다.
그러던 중 친목회에서 송별회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나왔다.
퇴근길, 친목회장님이 말했다.
“팀장님, 인기 많으세요. 35명이나 될 듯합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알았다.
그동안의 시간이 혼자 버틴 시간이 아니었음을.
급식실에서 건네진 말
점심 급식 시간, 직원 한 분이 조용히 다가왔다.
“팀장님, 정말 가시는 거죠?
안 가셨으면 좋겠지만… 잘 되셔서 가시는 거라 오히려 기쁘기도 해요.”
이어 말했다.
“팀장님은 늘 저에게 선생님 같았어요.
항상 친절하게 웃으며 대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존경해요.”
승진인지, 이동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었다.
어디에 있든 잘될 사람,
어느 곳에서나 사랑받을 사람이라는 말이 이미 충분했다.
에필로그 — 남겨진 온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성탄절 전야의 공기는 차가웠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실 크리스마스 카드,
운동하겠다는 약속,
나래 선생님께 월급을 주겠다는 선언,
그리고 직장에서 남겨진 인사들.
떠난다는 것은 자리를 비우는 일이 아니라
온기를 남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온기를 품고 나는 새로운 곳으로 이동할 준비를 한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작가의 말
이동은 늘 결심보다 늦게 마음에 닿는다.
서류로는 끝났지만 마음은 사람과 공간에 남아
조금 더 머물다 온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
선생님들과 직원들의 인사한 줄,
성탄절 전야의 공기 속에서
나는 떠난다는 것이 비워내는 일이 아니라
고마움을 정리하는 일임을 배웠다.
이 기록은
아버지와 나를 잇는 다리이자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조용히 건네는 인사다.
다음 편 예고
다음 편에서는 아버지가 약속하신 크리스마스 카드,
운동과 색칠공부를 둘러싼 작은 약속들,
그리고 다시 찾은 고향집의 겨울 풍경을 담을 예정이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집,
아버지의 손글씨,
그리고 새해를 앞둔 마음의 준비까지.
다음 편에서는 12월 30일,
마지막 근무일과 송별식을 기록한다.
말로 다 건네지 못한 배웅들,
퇴근 후 혼자 남은 저녁의 공기까지.
이동의 끝에서 사람들이 남긴 마음을
천천히 담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