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신을 앞두고, 아직 정하지 못한 것을
프롤로그
연천의 겨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며칠째 영하 20도 가까운 추위가 이어지고 있다.
체감온도는 숫자보다 더 낮다. 이런 날씨 앞에서는 집도, 사람도 괜히 말을 아끼게 된다. 무엇이든 서두르면 금세 얼어붙을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22일, 브런치에 열두 번째 글을 올리며 달력을 다시 펼쳐 본다. 이틀 뒤면 아버지의 여든아홉 번째 생신이다.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다. 무엇을 드릴지, 얼마나 머무를지, 어떤 말을 먼저 꺼낼지. 다만 마음 한쪽이 먼저 바빠지고 있을 뿐이다. 생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생각은 이미 그날을 몇 번이나 지나갔다.
생신이라는 날짜
여든아홉이라는 숫자가 먼저 다가온다. 축하라는 말보다 그동안의 시간이 먼저 겹쳐진다.
이 숫자 안에는 젊은 날의 아버지도, 아직 건강하던 중년의 아버지도, 지금의 아버지도 함께 들어 있다.
예전 같았으면 자연스럽게 준비했을 일들이 지금은 하나하나 멈춰 서서 생각하게 만든다. 이 생신은 기쁘게 지나가야 할 하루이면서도 조심스럽게 건너야 할 하루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날짜를 기념하기보다 먼저 바라본다.
요양원에서 맞게 될 생신을 떠올리며
아버지는 요양원에 계신다. 그곳의 하루는 날짜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콧줄을 하고 계셔서 뉴케어로 식사 시간은 정해져 있고, 족욕 시간도 늘 비슷하다. 창가로 들어오는 빛의 방향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생신이라고 해서 하루의 리듬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고민하게 된다. 무엇을 더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건드리지 말아야 할지를. 괜히 들뜨게 만들지 않는 것, 괜히 기대하게 하지 않는 것. 요즘의 생신은 그런 조심히 먼저 필요해졌다.
선물을 생각하다가 멈추는 순간들
옷을 떠올렸다가 지우고, 보습크림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기념이 될 만한 물건들은 지금의 아버지에게 오히려 관리해야 할 일이 될 수도 있다. 기쁨보다 번거로움이 먼저 닿는다면, 그건 선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선물은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보다 받는 사람의 하루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걸 요즘은 자주 배운다. 아버지의 하루는 이미 정해진 순서로 흘러가고 있고, 그 흐름을 굳이 흔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생각은 자꾸 멈추고, 결정은 뒤로 미뤄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 역시 요즘의 나에게는 하나의 책임처럼 느껴진다.
아버지가 요즘 가장 또렷한 순간
아버지는 여전히 많은 것을 정확히 기억하신다. 주민등록번호, 주소, 군번, 통장 비밀번호, 그리고 유일하게 기억하시는 핸드폰번호 내 휴대전화 번호. 그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을 더 조심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요즘 가장 또렷한 반응은 다른 데서 나온다. 족욕을 할 때 “물이 따뜻하다”는 말, 손을 닦아드릴 때 잠시 머무는 눈길. 선물은 기억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편안하게 하는 쪽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자주 그 생각으로 돌아온다.
고향집을 떠올리는 이유
보일러를 고친 고향집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그 집에 계시지 않지만 집은 여전히 아버지를 기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사람이 없어도 온도는 지켜지고 불은 켜질 수 있다.
이 겨울이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이유는 날씨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집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이전보다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그 거리를 어떻게 대할지, 요즘 나는 자주 생각한다.
아직 정하지 못한 생신의 모양
이번 생신은 무엇을 할지보다 어떻게 머무를지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오래 있지 못해도 괜히 서두르지 않는 시간,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방문.
괜히 약속을 만들지 않고, 괜히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태도도 필요해 보인다.
지금의 아버지에게 중요한 건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하루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은 정하지 못한 채로 두는 것도 하나의 준비일지 모른다. 모든 걸 정해두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지금의 나는 그 가능성 앞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건너온 온기
19일, 환영식이 있었다. 함께한 식사와 차 한 잔 속에서 웃음이 오갔고, 마음이 먼저 가까워졌다. 처음 만난 자리였지만 어색함보다는 편안함이 앞섰다. 행복이라는 말이 과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20일에는 같이 발령받은 주무관님께서 입방식으로 인절미 한 말과 개별 포장의 영양떡, 약식을 정성껏 준비해 주셨다.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담긴 환영이었다. 그 온기는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21일에는 케이크와 빵, 디퓨저로 마음을 화답했다. 받은 마음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고마움을 전하기에는 충분했다.
22일에는 대표님께서 점심을 내주셨다. 왕갈비탕과 만두가 놓인 식탁 앞에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부모님 이야기에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학창 시절 이야기로 분위기는 다시 웃음으로 번졌다.
대표님의 성함은 용각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용각산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사랑하는 동그리는 ‘똥끌이’와 ‘츄파춥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네 해 전 떠나신 아버지께서 막내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말 한마디, 기억 하나가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때 순옥이가 셋이라 첫순이, 중순이, 끝순이로 불렸던 기억. “그럼 예쁜 순서냐”는 질문에 끝순이라고 했더니 그럴 리 없다며 웃으셨다. 통통돼지라는 애칭에 동그리는 “딱 어울린다”며 웃음을 보탰다.
그날의 웃음과 온기, 사람들 사이를 오가던 말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일보다 사람이 먼저였던 시간, 그게 이곳의 시작이었다.
전하고 싶은 말만은 분명하다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마음속에 있다. 집은 괜찮고, 나는 내 자리를 지키고 있고, 아버지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
요즘의 아버지에게는 앞으로의 계획보다 지금의 안부가 더 중요할 것 같아서, 나는 그 말만은 꼭 전하고 싶다. 괜찮다는 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축하보다 안심이 먼저 닿았으면 좋겠다. 그 말 하나면 이번 생신은 충분하고도 남을지도 모른다.
에필로그
생신은 아직 오지 않았고 선물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은 이미 아버지 곁을 여러 번 다녀왔다. 고향집을 거쳐 요양원의 창가까지.
아직은 준비 중인 마음으로 이 하루를 적어둔다. 다가올 하루를 조금 덜 차갑게 맞이하기 위해서. 이 글은 그 예행연습 같은 기록이다.
작가의 말
이 글은 생신을 기념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생신을 앞두고 마음을 정리하는 기록이다. 결정하지 못한 상태로 머뭇거리는 시간 역시 돌봄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을 이번 겨울에 배운다. 잘하지 못해도,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날도 있다는 것을 이 글에 남겨두고 싶었다.
다음 편 예고
다음 편에서는 아버지의 생신 당일을 기록하려 한다.
결국 선택한 선물과 그날의 표정, 오래 머무르지 못한 방문 뒤에 남은 마음까지.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생각들과 집으로 돌아와 다시 조용해진 밤의 온기까지, 그날 하루가 남긴 흔적을 차분히 적어보려 한다.
크게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될 하루에 대해, 다음 이야기로 이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