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봄 티셔츠

입춘, 그리고 딸의 스물두 번째 생일

by 최순옥


입춘, 그리고 딸의 스물두 번째 생일

2026.2.4.

입춘이라고 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이 문을 두드리는 날이다.

달력 속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소연이, 내 딸의 스물두 번째 생일이다. 겨울 한가운데서 태어난 아이가 매번 봄의 문턱에서 나이를 먹는다. 끝과 시작이 맞닿은 날에 네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해마다 새삼스럽게 마음에 남는다.

세상에 나오는 날부터 계절을 건너는 아이였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인지 너의 생일은 늘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스물두 살이 됐다고 해서 모든 걸 잘 해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엄마는 말해주고 싶다. 단단해지지 않아도 되고, 흔들려도 되고,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는 나이다. 조금 헤매도 괜찮고,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것도 괜찮다. 세상은 늘 앞서가라고 재촉하지만, 너는 네가 설 수 있는 속도로 걸어도 된다.

소연이가 좋아하는 딸기케익

느려도 괜찮고, 방향을 바꿔도 괜찮다. 엄마는 이제야 안다. 삶에는 정답보다 호흡이 먼저라는 걸, 숨을 고를 수 있는 사람이 오래 걸을 수 있다는 걸.

엄마는 네가 잘되는 것보다, 네가 너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할 줄 알고, 기쁠 땐 마음껏 웃을 줄 아는 아이로 살아가길 바란다. 오늘만큼은 그동안 애써 버텨온 너를, 네가 먼저 꼭 안아줬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먼저, 너 자신을 다독일 수 있기를. 엄마는 늘 말없이, 설명하지 않아도, 네 뒤에서 네 편으로 서 있을게. 그 자리는 변하지 않는다.

태어나줘서 고맙고, 지금까지 잘 살아줘서 더 고맙다.

생일 축하해, 우리 소연이. 사랑해.


귀한 손녀

그날은 아버지를 뵙고 돌아온 날이었다. 소연이 생일 이야기를 꺼내자, 아버지는 손녀를 “귀한 아이”라고 부르셨다.

그 말 한마디에, 세대를 건너온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큰 선물을 주셨다. 금액보다 마음이 먼저였고, 계산보다 사랑이 앞섰다. 아버지에게 손녀는 늘 ‘앞으로 살아갈 이유’ 같은 존재인 듯했다.

나에게도 그 말은 오래 남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을 붙잡았다.

손녀의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늘 힘이 들어간다. 또렷하지 않은 발음 속에서도, 그 이름만은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느껴진다.


손녀는 아버지에게 기억의 끝이 아니라, 아직 이어지고 있는 삶의 이유다. 아버지는 그렇게, 지금도 손녀를 통해 오늘을 붙잡고 계신다. 그 모습이 때로는 고맙고, 때로는 마음 아프다.


아버지의 시간, 그리고 오늘 드린 선물

고향집을 다녀오신 뒤,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운동과 활동에 조금 더 잘 참석하고 계신다.

몸이 깨어 있는 날들이 늘어났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얼굴에도 생기가 도는 날이 있다. 그 변화가 나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틋했다. 하루하루가 선물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오늘은 연가를 내고 딸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의 봄 옷을 사드렸다.

겨울 내내 입던 옷보다 조금 가벼운, 블루와 베이지 계열의 티셔츠 두 벌이었다. 요양원 복도를 걸으실 때, 계절이 먼저 아버지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옷을 손으로 매만지시며 아버지는 “봄이 오긴 오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짧은 말이 오래 남았다. 봄을 말하는 그 목소리가, 유난히 부드러웠다.


아버지가 늘 차고 계신 시계도 떠올랐다. 해와 별이 함께 새겨진 시계였다. 일 년 넘게 손목에 있던 가죽줄이 많이 닳아, 줄을 교체해 다시 채워드렸다. 시간을 확인하기보다, 익숙한 무게를 놓치지 않게 해드리고 싶었다.

새 가죽줄을 찬 시계를 보며 아버지는 잠시 웃으셨다.

그 웃음 하나로, 그날은 충분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기억의 회상

가끔 아버지는 섬망처럼 말씀하신다.

“소 밥 주러 가야지.”

우리를 키우기 위해, 학비를 보태기 위해 소를 기르던 시절로 마음이 돌아가신 모양이다.

책임이 가장 컸고, 가장 애썼던 시절로. 기억은 과거로 흐르지만, 마음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몸은 늙어가도, 부모의 역할은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는 걸, 그 모습이 말해준다.

과거로 회귀하면서도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 기억은 흐려져도, 돌봄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제야 안다. 부모라는 존재는 끝까지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 사실이 늦게 와서, 더 깊게 남는다.


세대의 숨, 이어지는 마음

아버지의 손에서, 딸아이의 생일까지. 돌봄은 그렇게 이어진다. 부모는 자식을 걱정하고, 자식은 다시 부모를 돌보며, 그 사이에서 하루의 숨이 이어진다.

입춘의 바람은 아직 차지만, 봄은 분명히 오고 있다.


아버지의 시간도, 나의 하루도, 소연이의 스물두 살도 각자의 속도로 계절을 건너고 있다. 그 속도가 다를 뿐, 모두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오늘 나는 안다.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버텨온 시간의 결과라는 걸. 그리고 사랑은 늘, 너무 가까워서 지나고 나서야 조금 늦게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도.


작가의 말

딸의 생일과 아버지의 시간을 함께 떠올리며, 나는 세대가 이어지는 숨을 느낀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기억 속으로 돌아가며, 그 사이에서 나는 오늘을 산다.

요양원이라는 공간 안에서도 계절은 흐르고, 옷 한 벌과 시계 하나가 하루의 기분을 바꾼다. 돌봄은 여전히 무겁지만, 사랑은 여전히 나를 살게 한다. 입춘의 하루, 나는 다시 숨을 고르고, 내 몫의 하루를 받아들인다.


다음 편 예고

다음 편에서는 딸의 생일이 지나간 뒤 남은 여운과, 요양원에서 이어지는 아버지의 하루,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의 자리에서 돌봄과 거리 두기 사이의 마음을 더 오래 들여다보려 한다.


웃음과 피로, 책임과 숨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나를 지키는지, 조금 더 솔직하게 기록해보려 한다. 숨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그 숨 위에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