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형 v. 노력형 - 차라리 널 몰랐더라면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중 4권

by 아테나
Now I no longer hoped, but feared, she would say: Do you want to read these pages I've written, I've been working for years, I'll send them by e-mail.

그때쯤 나는 더 이상 릴라가 "내가 쓴 거 한번 읽어볼래? 지난 몇 년간 써온 것들인데 이메일로 보낼게." 라고 얘기할까,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워했다.


릴라가 어마어마한 작품을 몰래 준비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와 동시에 두려움에 시달리는 레누. 소설, 비소설, 장르를 막론하고 릴라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만 한다면 모두의 찬사를 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레누. 릴라는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가? 차라리 릴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레누는 더 행복했을까?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레누와 릴라의 역사를 담은 4권의 소설 (작가는 한 권의 책이라 생각하고 썼다고 한다.) 둘은 친구이면서 때론 남남처럼 지내고, 동지이면서 적이고, 파트너이면서 경쟁자다. 2권을 끝냈을 때는 아쉬운 마음에 속도 조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독성이 좋았다. 말 잘하는 이야기꾼이 옆에서 쉬지 않고 수다를 떠는 느낌이랄까? (제1권 "나의 눈부신 친구"와 베일에 싸인 작가 엘레나 페란테에 대한 이야기는 앞편에 살짝 풀어놓았다).


먼저 주요 등장인물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등장인물이 꽤 많고 혈연과 연애와 결혼으로 얽히고설킨 관계라 다 쓰긴 어렵다):


레누 (본명 "엘레나 그레코" - 동네에서 "레누" 또는 "레누치아"로 불린다.) - 책의 화자. 가난한 집안의 장녀이고 성실한 노력파. 작가로 성공을 이루지만 자신을 늘 릴라에 비교하며 부족함을 느낀다.


릴라 (본명 "라파엘라 세룰로" 동네에서 "리나"로 통하지만 엘레나에게는 "릴라"로 불린다.) - 신발수선공 아버지, 꼬장꼬장한 엄마, 허세 많은 오빠가 있다. 다방면으로 천재성을 가지고 있어 못하는 게 없는데 신께서 미모까지 주셨다. 하지만 얼굴도 몸도 막 쓰는 편.


엔조 - 과일행상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어릴 때부터 일을 도왔다. 초등학교 때는 그저 힘센 말썽꾸러기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공부머리가 뛰어난 아이였다. 성실하고 듬직한 청년으로 자라 릴라와 함께 동네사람들을 돕는다.

니노 - 아... 니노... 널 어쩌면 좋을까. 바람둥이에 기회주의자다. (너무 몰입을 하는 바람에 니노가 등장할 때마다 책을 덮고 싶었다.)


솔라라 형제 (미켈레 솔라라 & 마르첼로 솔라라) - 동네 건달들이다. 사채업을 하던 엄마의 힘으로 조직을 키우고 종국에는 마약과 매춘 등등 온갖 나쁜 짓은 물론이고 나폴리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마피아 세력. 이 중 미켈레 솔라라는 릴라를 숭배하다시피 하는데 그 집착의 끝이 과연 어디일지, 독자들의 궁금증을 일으킨다.



"Lila didn't have that type of ambition. She had never had ambitions. To carry out any project to which you attach your own name you have to love yourself, and she told me, she didn't love herself, she loved nothing about herself.

릴라에게는 그런 야망이 없었다. 그녀는 그 어떤 야망도 가진 적이 없었다. 무엇이든 자기 이름을 내걸고 하는 일이라면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릴라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을뿐더러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I loved Lila. I wanted her to last. But I wanted it to be I who made her last. I thought it was my task. I was convinced that she herself, as a girl, had assigned it to me."

나는 릴라를 사랑했다. 나는 그녀가 오래도록 남아주길 바랐고,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내가 그것을 이뤄주고 싶었다. 그것이 어린 시절의 릴라가 나에게 맡긴 임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평생 릴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레누. 둘 중 사회적인 명성과 성공을 이룬 것은 분명 레누인데도 그녀는 늘 자신을 릴라와 비교한다. "비교"라는 단어를 썼지만, 릴라는 레누가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과 같다. 열등감도 있고 질투도 하지만 꼭 필요한 순간에 레누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것 또한 릴라다. 정작 릴라 본인은 자신의 천재성과 아름다움에 그다지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여자는 욕망과 폭력의 타겟이 된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외양을 가꾸는 것에 관심이 없다.


릴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스터리다. 겨우 열여섯의 소녀가 결혼을 하고 가족들을 부양하고, 서른이 넘어서는 동네를 먹여 살린다. 편히 살 수 있었음에도 어려운 길만 골라서 가는 쌈닭 - 마냥 응원하기에는 마음이 아프다. 가난과 싸우고, 폭력과 싸우고, 마약으로 동네를 병들게 하는 조직과 싸우고.


작은 여자아이가 자라서 그저 행복하길 바라는 건 너무 동화적인 바람인가? 릴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꿈꾸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


(굳이 영어로 읽으라 권하고 싶지 않다. 한글보다 영어가 더 편하다면 모르지만, 어차피 이태리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소설인데 굳이 영어로 읽을 필요가 없다. 이태리어 실력자라서 이태리어 원서로 읽는 게 아니라면 본인이 가장 편히 즐길 수 있는 언어로 온전히 즐기며 읽기 바란다. 나는 한글판을 구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영문으로 읽었지만 다음에 한글 번역본을 꼭 읽어보고 싶다.)


나폴리 4부작 (Neapolitan Quartet) by Elena Ferrante

제1권 - 나의 눈부신 친구

제2권 -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제3권 -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제4권 -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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