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에서 정신이 들기까지는.
객관적으로 보기엔 그랬다. 먹고살만한 직장이 있었고,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직원들은 언제나처럼 좋은 동료였다. 자녀를 대학에 보냈고 배우자와의 관계도 원만한 듯했다. 두어 달 전 우울증이 오긴 했지만 상담을 받고 있었고 꽤 좋아진 것 같아 상담 주기를 더 길게 잡기 시작했다. 은퇴까지 대략 8년만 열심히 벌면 된다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울증으로 식욕이 떨어져 20대 체중으로 돌아간 것 또한 개이득 아닌가, 생각했다. 경찰서에서 정신을 차리기 전에는.
그날도 지난 15년을 그리했듯 같은 곳으로 출근을 했고, 연말 휴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만 더 출근하면 2주간의 꿀 같은 휴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제냐고, 누구라도 말했을지 모른다. 나의 배우자가 그랬듯이.
휴가 전 마지막 주는 정신없이 바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 주엔 아무 약속도 잡지 않았다. 상담 약속도 친구들과의 약속도 잡지 않았다. 그런데 휴가가 가까워질수록 출근이 점점 더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업무량에 대한 스트레스인가 싶어 하루는 날 잡고 야근을 했다. 밀린 일을 해치웠다. 그런데도 집에 오면 다음날 출근이 고통스러워 늦은 시간까지 각종 쇼츠를 보다 새벽 2시를 넘겨 자곤 했다. 그러다 목요일 오후 참을 수 없을 만큼 일이 하기 싫어졌다. 금요일 하루만 일하면 연말 휴가가 시작되는데. 월요일에 잠깐 출근을 하긴 해야 하긴 했지만 공식 출근은 아니었고 두어 가지 일만 마무리 지으면 끝날 일이었는데.
오후 3시가 되기도 전에 사무실에 연말연시 축하 겸 구비해 둔 와인을 한잔 따랐다. 그리고 한잔 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접자고 생각했다. 직원들도 힘들 텐데 일찍 퇴근시키자. 그렇게 혼자 사무실에 남아 또 한잔을 마셨다. 텅 빈 사무실에서 누가 날 말릴쏘냐.
그때까지만 해도 일찍 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5시쯤 갑자기 밖에서 한잔만 더 마시고 싶었다. 아침에 라테 한잔 마시고 공복이었던 차라 식당에서 뭐라도 먹고 한잔 곁들여야겠다 생각했다. 사무실 근처 일식집에서 회 몇 점과 작은 사케를 시켰다. 안면이 있던 식당사장과 반갑게 인사하고 또 한잔을 했다.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아니, 경찰과 대응하는 부분부터 기억이 난다. 유치장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풀려나올 때도 끊어진 기억의 고리를 계속해서 더듬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차는 어디에?
알코올의존증이라고? 내가?
그 일이 있기 전 나에게 물어봤다면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1년 내내 술을 마시는 사람도 아니고 술자리를 자주 갖는 사람도 아닌데? 물론 술을 좋아하긴 하지. 이 것도 없으면 어떻게 살라고? 그래, 가끔 날 잡고 죽을 때까지 마실 때가 있긴 하지. 그러다 기억이 잘려나가기도 하고. 그래도 알코올의존증은 아냐. 몇 달을 안 마시기도 하는 걸? 물론 스트레스가 밀려오면 다시 야금야금 마시긴 해. 그래도 알코올의존증은 아니지. 멀쩡히 출근을 하고 내 몫의 할 일을 해내고 직장에서 실수한 적 없고.
아니, 이 정도도 안 마시고 사는 사람도 있어?
이런 걸 고도적응형 알코올의존증이라고 한다지. 나 같은 자들의 특징은 이러하다.
x 낮에는 유능한 직장인으로 살고 밤에는 폭음하거나 혼자 마신다.
x 전날 밤 음주로 필름이 끊겨도 다음 날 아침 멀쩡히 출근하여 업무를 수행한다.
x 열심히 일했으니 이 정도 술은 마셔도 된다며 술로 스스로의 고됨을 보상한다.
x 주변에서 "술은 좀 마시지만 일은 잘하잖아" 소리를 듣는다.
미국 NIAAA (국립 알코올 남용 및 중독 연구소)는 "기능적 유형 (Functional Subtype)"이라고 분류하는데 2007년 조사에 의하면 전체 알코올 의존증 환자의 약 19.5%에 해당한다고 한다. 기능적 유형의 알코올의존증에 속하는 이들은 대체로 중년이며 높은 교육 수준, 안정된 직장과 소득을 갖고 있으며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어가며 가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중 4분의 1은 심각한 우울 장애를 겪은 적이 있다.
대부분의 고도적응형 알코올의존증 환자는 자신의 알코올의존증을 인정하지 않는다.
술 때문에 길바닥에 나앉은 것도 아니고, 아침부터 마시는 것도 아니고, 술 때문에 출근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마시지도 않으니, 스스로도 주위에서도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자신의 의존증을 알게 되는 시기가 매우 늦다. 대부분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나 음주운전 같은 문제가 생겨야 인지하게 된다고 한다.
택시를 불러 찾아간 곳에서 본 내 차는 처참히 찌그러져 있었다. 내 둘째라고 할 만큼 아끼는 차였는데 (아직 할부도 남은 내 차가), 무엇을 어떻게 박아서 사고가 난 건지 기억이 없다. 다른 차를 박은 건 아니겠지? 다친 사람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새벽에 경찰서에서 날 순순히 보내줬을 리가 없잖아?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공포가 밀려왔다.
내가, 이런 미친 짓을 했다니.
이곳이 바닥이다. 나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