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공기가 과묵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눈을 떴을 때 그렇게 어둡지 말아 달라 달아놓은 반투명 속커튼이 암막커튼이 될 때. 그 변해버린 커튼너머 아스팔트를 달리는 두 개의 혹은 네 개의 바퀴 소리가 ‘와아앙-’이나 ‘부우웅-’ 이 아닌 ‘촤아앙-'이나 ‘촤우웅-’ 일 때. 그땐 백 퍼센트 확률로 비가 오고 있다.
그런 날엔 쏟아지는 수분에 꽉 잡혀 공기가 과묵해진다. 그리고 나도 과묵해진다.
혼자 사는데 과묵하지 않을 날이 뭐가 있을까 싶겠지만 하루 중 몇 번 나를 위한 리액션을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밥 먹고 “하, 배불러” 라던가, 웃긴 영상을 보고 “와하하, 겁나 웃기네!”라던가. 하지만 비가 오는 날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한 마디가 끝이다.
“아,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 문장을 외친 후엔 고집스럽게 게으름뱅이가 되고 싶어 진다. 밖에 나가 찰박거리는 물바닥을 밟으며 짐 같은 우산을 쓴다는 상상만으로도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집에서 뭔갈 할 거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허리가 아프고 손가락이 뻐근할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자극적인 숏폼만 보고싶다. 이상하게 비 오는 날은 그렇다.
시간이 곧 돈인 직업인지라 매일을 바쁘게 지낸다. 들어온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일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한다. 그러니까 타고나길 피곤하게 태어난 사람인데 비만 오면 그렇게 게으른 의지박약자가 된다. 타고난 성격을 보완하기 위한 또 다른 타고난 성격일지도 모른다.
상극의 두 성격들로 여러 차례 비를 맞이했지만 게으름뱅이는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비 오는 날은 암묵적인 게으름데이가 되었고 그 날 만큼은 피곤하게 굴지 않고 온전히 쉬어버린다.
항상 싫었던 비가 가끔은 반가운 걸 보니 여로모로 좋은 일이다. 덕분에 유달스런 공기에 과묵해지지 않는 날도 많아졌고 똑같이 밥을 먹고 예능을 보며 나를 위해 리액션을 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별로였던 두 성격은 내가 지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주었다. 사람은 평생을 탐구해야 할 존재로 미운 내 모습과 지독하게 마주 할 것인데, 단점과 무언가가 만나면 꽤 멋진 모습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그게 별일일까 싶다.
오늘은 날씨가 맑다.
몹시 강단 있는 저 마음으로, 계속 탐구될 작은 부분들까지 받아드리며 별일 없이 피곤 떨며 움직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