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by 누비


로마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12시간.

저녁이면 시칠리아로 떠나야 한다.


로마는 내게 시칠리아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도시이지만,

나는 이 곳의 이야기와 공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숙소 밖을 나섰다.



숙소 밖을 나와

내가 로마에서 처음 본 것은 다름 아닌 무궁화였다.


“무궁화? 우리나라 꽃인데?”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꽃을 바라봤다.

가까이 다가가 요리조리 다시 봐도 무궁화였다.


알고 보니 무궁화는 로마에서 흔한 가로수였다.

더위와 가뭄에 강하고, 도시의 공해에도 잘 견뎌

여름 내내 로마의 거리를 화사하게 물들인다고 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어릴 적 놀이의 주문처럼,

나는 잠시 그곳에 멈춰 서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의 로마여행은

낯선 곳에서 만나는 고향의 꽃,

무궁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첫 행선지는 콜로세움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펼쳐진 풍경은,

마치 교과서 속 사진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했다.

지난밤의 비로 하늘은 맑았고,

햇살은 오래된 돌담을 금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부루마블에서나 보던 콜로세움이 눈 앞에 있다니“


건축물에는 감흥 없는줄 알았던 나인데,

콜로세움은 오래 바라보고 싶을 만큼 가히 감동적이었다.


나는 오늘 로마를 떠나기 전,

이곳에 다시 오리라 다짐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콜로세움 주변은 모두 유적지였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캄피돌리오 광장, 포로로마노…


모두 그냥 돌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 시절 로마가 얼마나 찬란했는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리고 콜로세움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트레비분수로 향했다.



트레비 분수에는 미신이 있다.

동전 하나를 던지면 로마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두 개를 던지면 새로운 사랑을 만나며,

세 개를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는 미신.


나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했으니,

동전 하나를 트레비분수에 던지며 소원을 빌었다.


‘다음 이탈리아 여행은 내가 만든 가족과 함께 오길’



트레비 분수에서 10분쯤 걸어 판테온에 도착했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을 뜻한다.

미켈란젤로가 “이건 천사의 설계다”라고 찬미했던 건축물이기도 하다.


천장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는 돔 형태의 건축물인데

그 비례와 균형이 매우 뛰어나 천년이 지나도 견고했다.

그리고 비가 내려도 바닥에 물이 고이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토록 완벽한 건축을 할 수 있었던 로마인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가려고 마음 먹은 곳들을 모두 가보았는데도

시간은 아직 오전이었다.

나는 예정에도 없던 바티칸에 가보기로 했다.


내 모든 여행이 그렇듯, 즉흥적으로 버스를 타고

커다란 성벽 앞에서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이었다.


바티칸 박물관은 4시간 이상 대기해야된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의 발길을 무작정 따라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모두가 향한 곳은 성베드로 대성전이었다.


광장은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로 빼곡했고,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십여년 전 고대축제 이후 이렇게 많은 인파는 처음이었다.


바티칸이 곧 카톨릭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나는 성당에 다니는 친구, 현수에게 사진을 보냈다.

“이것 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답장이 왔다.

“올해가 희년이고, 미국인 교황이 새로 와서 많을 거야“

“그리고 수요일은 교황 볼 수 있는 날이야. 운좋다 너.“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멀리서 보이는 교황의 모습.

나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방인이지만 경건한 마음을 함께 느꼈다.

종교의 힘이 이렇게 까지 강하구나, 처음 알게 되었다.


미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파도처럼 흩어졌다.

그 파도를 타고 나도 바티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곳에 온 목적, 젤라또 가게로 향했다.



10년 전, 남편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맛있었다던 젤라또집에 도착했다.

평소에 디저트를 즐기지 않는 나지만

남편과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다.


3.5 유로를 내고 ‘패션후르츠 젤라또’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맛은 정말 놀라울 만큼 맛있었다.


‘내가 여태 먹은 건 젤라또가 아니었구나’

맛있다는 말 외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후로 나는 11일간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젤라또를 먹었지만

이 곳에서 먹은 젤라또가 가장 맛있었다.


트레비 분수가 내 소원을 들어준다면,

다음엔 남편과 함께 와서 먹어야지.



이후 보르게세 공원과 진실의 입을 구경하고,

바로 옆 코스메딘 성당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발렌타인데이의 기원이 된,

성 발렌타인의 유해가 있었다.

매년 2월 14일마다 남편에게 해줄 얘기가 하나 생겼다.


성당의 천장은 한옥처럼 서까래로 되어 있었다.

돌로 된 건물들만 보다가 나무를 보니 왠지 색다르고 반가웠다.


그동안 성당은 내 취향이 전혀 아닌 줄 알았는데

우연히 들어간 이 작은 성당이 주는

고즈넉한 품격과 성스러움에 반했다.


누군가 진실의 입에 간다면

이곳에 꼭 한 번 가보는 걸 추천한다.



이제 로마에서 볼 건 다 봤다.

마지막으로 다시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이곳에선 왜 걸음이 안 떨어지는 지 모르겠다.


콜로세움의 외벽을 따라 원을 그리며 걸었다.

아이를 낳고, 퇴직을 하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콜로세움은 여전히 이 자리에 있겠지.


로마는 그런 곳이었다.

다른 시간, 같은 곳에서

과거의 누군가와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힘이 있는 곳.


다음 로마는 누구랑 오게 될지 모르지만,

다시 오게 된다면

콜로세움과 젤라또집은 꼭 다시 가겠다고 다짐했다.


띵똥-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항공기 출발까지 4시간 남았다는 알림이었다.


이제 시칠리아로 떠날 시간이다.


시칠리아로 가기 전, 로마공항 라운지에서





토요일 연재
이전 01화‘오래 준비해온 대답’의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