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기다렸다고!
시멘트처럼 굳은 마음을 녹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시멘트처럼 굳은 마음을 녹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새벽 5시의 전쟁
**2020년 8월 20일**
또다시 새벽까지 이어지는 키보드 소리
탁탁탁탁.
마우스 클릭 소리.
가끔 터져 나오는 괴성.
"아 씨발! 이 새끼들이!"
온라인 개학이라 수업만 틀어놓고 게임을 한다.
선생님한테 확인 전화가 온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새벽 3시에 문을 열고 소리 좀 줄이고 그만 자라고 했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5시가 되자 참을 수 없었다.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언제까지 게임할 건데?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건데!"
어디서 징징거리냐며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대꾸도 안 하는데 뚜껑이 열렸다.
자던 남편까지 깨서 역성을 들자, 아들은 바로 현관문으로 직행했다.
가출을 하려는 아들과
물리적, 감정적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 아들의 절규
"얼마나 기다렸다고!"
일촉즉발의 순간, 아들이 부르르 떨며 노려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얼마나 기다렸다고 생색내냐고!"
그 순간 나는 멈춰 섰다.
십년 넘게 엄마 빈자리를
아들의 관점에서 보면 어땠을까?
3살 "엄마는 왜 맨날 늦게 와?"
5살 "엄마는 왜 주말에도 회사 가?"
7살 "엄마는 왜 핸드폰만 봐?"
9살 "엄마는 왜 내 말을 안 들어?"
11살 "엄마는 왜 나한테만 화내?"
십년 넘게 엄마 빈자리를 참아내고,
엄마의 무관심과 무정함을 견뎌내야 했던 아들에게
엄마의 요구는 그저 투정이자 징징거림이었을 것이다.
내가 집에 한 달 있었다고 해서,
십년 넘게 쌓인 서운함과 상처가 사라질 리 없었다.
#회사에서의 나 vs 집에서의 나
회사에서는:
- 중요한 보고 전날 밤 12시까지 자료 완성
- 광고주 요청 사항 즉시 반영
- 팀원들 의견 경청하고 피드백
- 세심한 케어와 지속적인 관심
집에서는:
- 아이 숙제 확인은 "알아서 해"
- "엄마 피곤해"가 입버릇
- 핸드폰 보면서 대답
- 가끔 관심 보이다가 금세 포기
회사일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아들에게는 늘 '나름'이었다.
그만하라는 말을 참아낸 이유
"너 이럴 거면 집에서 나가!"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을 꾸역꾸역 삼켰다.
시간이 지나고 진정이 되면서 두 가지가 선명해졌다.
첫째, 아들의 "얼마나 기다렸다고!" 반응이었다.
십년 넘게 엄마를 기다려온 아이에게
한 달의 관심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둘째, 그래도 '나가라'는 소리를 참아낸 나 자신이었다.
순간 치밀어오르는 혈기에
"내가 벌어서 산 집에 너 같은 자식 꼴을 참아낼 수 없다"고 했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나갔을 것이 뻔했다.
어떤 말도 무시하기 일쑤지만, '집 나가라'는 말은 즉각 시행한다.
예민하고 불안한 아이에게 나가라는 말은
거절과 포기의 의미이기에 절대 금기어였다.
#온도 차이
"그만해. 너 지금 그거 가스라이팅이야."
며칠 후, 둘째와 싸우는 큰아들을 말리며 한 말이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에 아이는 발작 현상을 일으켰다.
엄마가 자기를 정신병자 취급했다고.
내 기준으로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진단이었다.
아이 기준으로는 인격적 모독이었다.
같은 말이어도 듣는 사람에 따라 온도가 달랐다.
#둘째를 통한 메시지
그날 밤, 둘째가 말했다.
"형아가 공부 포기했는지 엄마가 어떻게 알아?
형은 극도로 힘든 날들을 2년 넘게 기댈 사람 하나 없는데,
그나마 학원 다니는 게 최선이야.
엄청 노력하는 거라고."
형도 포기 안 하는데 왜 엄마가 포기한 거라고 생각해?
나도 형을 좋아하지 않지만, 형한테는 아무도 없잖아.
게임을 안 할 수가 없겠지.
엄마가 좀 잘해주다 형이 뭐라 한다고 바로 포기하면 어떻게.
형이 성질내도 엄마가 참고 넘기면 형도 좀씩 달라지겠지."
순간 둘째를 통해 신이 내게 메시지를 주는 느낌이었다.
내가 먼저 바뀌고 버텨야만
아이가 달라질 수 있다고
# 학부모의 시선 vs 부모의 시선
개학이다. 코로나 4단계라 온라인 개학이다.
온라인이다 보니 수업만 틀어놓고 잔다.
선생님한테 확인 전화가 온다.
내가 살아온 방식과 너무 다른 아들의 방식이 힘들지만,
학부모의 시선을 버리고 부모의 시선을 가질 수 있길 소원한다.
**학부모의 시선:**
성적, 출석, 진도, 다른 집과의 비교
**부모의 시선:**
아이의 마음, 상처, 성장, 온전한 회복
나는 지금까지 학부모 노릇만 했지,
부모로는 한참 부족했던 것 같다.
# 다시, 시작
"얼마나 기다렸다고!"
아들의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제는 기다리는 것을 연습해야겠다.
정말로.
아이가 원하는 속도로, 아이가 준비될 때까지.
십년 넘게 엄마를 기다려온 아이처럼,
이제는 내가 기다릴 차례다.
**다음 이야기: "강아지가 필요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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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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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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