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들과 나 #7

29만원 키보드 사건

by 하양

웬일로 친구 만나러 한강 간다는 아들에게 카드를 줬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먹든 스파게티를 먹든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퇴근길 결제 금액이 29만 3천원인 걸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아이는 친구와 용산에 가서 키보드와 헤드셋을 샀다.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어떻게 이 상황에 대처할지 막막했다.

화가 나는데 뭐라고 하면 도리어 성질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경계선이 없는 집**


29만원.

대학생 한 달 용돈에 맞먹는 금액을

고등학생이 한 번에 썼다.


문제는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20만원 넘는 게임 아이템을 샀고, 그 전달에도 15만원짜리 한정판 피규어를 샀다. 매번 사후 통보다.

" 이거 샀어. 필요한 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돌이켜보니 아이가 어릴 때부터 "돈 걱정은 하지 마"라고 했다. 학원비든 교재비든 뭐든 필요한 건 다 사주겠다고. 대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그게 아이에게는 "돈은 무제한"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부모는 ATM이 아니야"**


화가 나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그동안 배운 걸 써먹어보기로 했다.


"엄마 기분이 어떨 것 같아?"


"글쎄... 화났을 것 같은데?"


"응. 미리 이야기 안 하고 그렇게 큰 금액을 쓰니까 당황스럽고 기분이 안 좋아."


"그래도 엄마가 필요한 거 있으면 사라고 했잖아."


"맞아. 그런데 그건 필요한 거야, 갖고 싶은 거야?"


"...갖고 싶은 거."


"그럼 미리 상의했어야지. 부모는 ATM기가 아니야."


아이가 잠시 말이 없더니 중얼거렸다.


"엄마도 명품가방 갑자기 사잖아."


"...."


할 말이 없었다.



**어른의 특권?**


아이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도 스트레스받으면 충동구매를 했다. 백화점에서 50만원짜리 가방을 보고 "이거 예뻐" 하면서 그냥 샀고, 피곤한 날에는 20만원짜리 마사지를 받기도 했다.


"그건 내가 번 돈이니까"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게 진짜 이유가 될까?


아이 입장에서 보면 부모도 자기 기분에 따라 돈을 쓰는데, 왜 자기만 안 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평소에 "돈 걱정 말고 하고 싶은 거 해"라고 해놓고, 정작 큰 금액이 나가니까 "미리 말했어야지"라고 하는 것도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금전감각의 부재**


더 큰 문제는 아이에게 돈의 가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29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일해야 하는지,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더 중요한 일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이 없다.


아이에게는 그냥 카드 긁으면 나오는 숫자일 뿐이다.


내가 대학생일 때는 라면 한 개 먹을 돈도 아꼈다. 500원이 아까워서 버스 대신 걸어서 학교에 갔다. 그래서 돈의 소중함을 알았고, 함부로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아이는 그런 경험이 거의 없다. 원하는 건 대부분 사줬고, 용돈도 넉넉하게 줬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해주고 싶다"는 부모 마음이 도리어 아이의 금전감각을 망친 셈이다.



**선물의 의미**


"생일선물, 졸업선물, 입학선물 안 샀으니 그냥 선물이라고 쳐."


아이의 이 말에서 묘한 계산이 느껴졌다.


원래 받았어야 할 선물들을 못 받았으니, 그 값어치를 지금 받는 거라는 식의 논리다.


언제부터 선물이 의무가 되었을까. 언제부터 사랑을 돈으로 계산하게 되었을까.


어릴 때는 엄마가 만들어준 김밥도 좋아했는데, 이제는 비싼 걸 사줘야만 고마워한다.


마음을 담은 편지보다는 현금이,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는 명품이 더 의미 있는 선물이 되어버렸다.


바쁘다는 핑계로 돈으로 대신한 관심과 사랑의 결과물이다.



**경계 설정의 어려움**


그래도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10만원 넘는 건 미리 상의하자."


"그럼 엄마도 미리 말해."


"...알겠어."


서로 약속했지만, 과연 지켜질까 싶다.


아이는 이미 "부모 돈 = 내 돈"이라는 개념이 박혀있고, 나는 아직도 "이 정도는 사줘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특히 아이가 우울해하거나 힘들어할 때는 "그래, 이것 정도는 사줘야지" 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죄책감과 보상심리가 뒤섞여서 더 혼란스럽다.



**다른 집은 어떨까**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집마다 다르다.


어떤 집은 용돈을 정해서 주고, 그 안에서 알아서 쓰게 한다. 모자라도 더 주지 않고, 남아도 회수하지 않는다.


어떤 집은 아예 용돈을 주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상의해서 사주는 시스템이다.


어떤 집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스스로 벌게 한다.


우리 집은 어떤 시스템인지 모르겠다. 그냥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결정한다.


이런 일관성 없는 태도가 아이를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착잡한 가운데, 카드 영수증에 적힌 글자가 눈에 띄었다


'망함'


이거 뭐야?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그만큼 돈 쓸 계획이 없었는데 자기도 당황했다는 표현이었다.


그래도 내심 불편하긴 했다는게 그래도 이 두 글자가 한가닥 희망처럼 느껴졌다.


29만원 키보드 사건을 계기로 우리 집만의 규칙을 정하기로 했다.


1. 10만원 이상 구매 시 사전 상의

2. 한 달 용돈 한도 정하기

3. 큰 금액은 본인이 일부 부담하기


하지만 규칙보다 더 중요한 건 아이가 돈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 쉽게 얻을 수 있어서 소중함을 몰랐던 것들. 부모의 사랑도, 돈도, 기회도.


이제는 조금 어렵게, 조금 불편하게 만들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래야 진짜 소중한 게 뭔지 알게 될 테니까.


29만원짜리 키보드가 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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