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들과 나 #8

FBI협상법의 실패

by 하양

서점에서 『FBI 협상가가 전하는 대화의 기술』에 관한 책을 샀다.


인질범을 설득하고, 테러리스트와 협상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FBI 협상 전문가의 노하우라니.

이 정도면 사춘기 아들 하나쯤이야 뭐.


책을 읽으며 밑줄 긋고 형광펜 치고 메모했다. 특히 눈에 들어온 대목이 있었다.


**"상대방이 '그래, 맞아(That's right!)'라고 말하게 만들어라. '네(Yes)'가 아니라 '그래, 맞아'여야 한다. 그 순간 진짜 협상이 시작된다."**



**완벽한 문장 준비**


아들이 '그래, 맞아'라고 반응할 만한 문장들을 공들여 만들었다.


• "노력하는 거보다 타고난

재능이 있는 천재가 더 멋져 보이는 구나."

• "공부에 그닥 재능 없는 것 같아 하기 싫겠구나."

• "게임은 공부보다 재미있고 잘하기도 하는데 프로가 되기엔 어렵고 늦은 거 같이 여겨지기도 하겠네."

• "대학 안 가면 한국에서 무시받고 살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 "엄마는 온몸으로 공부 스트레스 줘서 짜증나지?."

• "공부해야 되는 건 알겠는데 진짜 하기 싫고 이유도 모르겠고."


완벽했다. 아이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낸 문장들.

이 정도면 '그래, 맞아'가 절로 나올 것 같았다.



**참담한 실패**


저녁에 아들 방에 들어가 슥~ 말을 꺼냈다.


"엄마가 보기에 너는..."


"뭐?"


"노력하는 거보다

천재형이 더 멋지게 느껴지는 거 같아."


아이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런 거 왜 묻냐고?"


"아니 물어본 게 아니라...

엄마가 네 마음을 좀 이해하고 싶어서..."


"하지마. 어설프게 아는 척."


그렇게 FBI 협상술은 30초 만에 처참히 무너졌다.



**무엇이 문제였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책에서는 분명 효과적이라고 했는데

왜 우리 아이한테는 안 통했을까.

인질범도 설득한다는 기법이

왜 고등학생 아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었을까.


금새 깨달았다.


아이는 바보가 아니다.

엄마가 갑자기 책 읽고 배운 티 팍팍 내며 접근하는 게 보이는 거다.


평소에는 "공부해라, 게임 그만해라" 하다가 갑자기 "너는 천재형이 멋지게 느껴지는 구나~" 하니까 이상하지.


게다가 그 문장들, 아무리 공들여 만들었어도 결국 엄마 머리로 짜낸 거다.

진짜 아이 마음이 아니라

내가 '이럴 것 같다'고 추측한 거다.


FBI 협상가는 오랜 시간 훈련받고 현장 경험을 쌓았지만, 나는 책 한 권 읽고 하루 만에 따라 한 거였다.



**더 근본적인 문제**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설득'하고 싶었던 거다.


책 제목도 '협상의 기술'이다.

협상은 뭔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다.


나는 아이가 공부하기를 원했다.

게임을 줄이고,

학원에 성실히 다니고,

시험을 잘 보기를 바랐다.


그래서 '일단 공감하는 척하면 마음의 문이 열리고, 그러면 내 말을 들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그걸 눈치챈 거다.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뭔가 얻어내려고 테크닉 쓰는 거라는 걸.



**진짜 깨달음이 온 순간**


며칠 뒤 우연히 북한에 억류되었던 선교사 영상을 봤다.


그 선교사가 북한 감옥에서 3년간 억류되었을 때, 힘들지만 성실히 얼은 땅에 삽질을 하던 선교사를 눈여겨 보던 북한 간수가 사춘기 아들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선교사는 얼은 땅 위에서 '진충분파(震衝分破)' 원리를 설명했다.


얼어붙은 진흙을 깨려면:

1. 진동 - 끊임없는 울림

2. 충격 - 반복되는 자극

3. 분리 - 조금씩 갈라짐

4. 파괴 - 결국 깨어짐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고. 꾸준하고 지속적인 진동을 거쳐 충격을 받으면 조금씩 변한다고.


**하루 10시간 게임하는 아이를 보며**


책상 앞에 앉아 또 게임하는 아들을 봤다.


FBI 협상술로 30분 만에 마음을 열게 하려던 내가 우습다.


북한 감옥에 갇힌 선교사조차 3년을 견뎠는데, 나는 책 한 권 읽고 당장 효과 보려고 했다.


진동, 충격, 분리, 파괴.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른다.

1년일 수도, 3년일 수도,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꾸준한 진동을 보내는 것뿐이다.


테크닉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시 시작**


FBI 협상술 책은 책장 깊숙이 넣어뒀다.


대신 매일 작은 것들을 실천하기로 했다.


맛있는 거 해주고,

얘기하면 들어주고,

그냥 옆에 있어주기.


당장 '그래, 맞아'라는 대답을 듣지 못해도 괜찮다.


언젠가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 스르르 흘러내리는 날이 올 거라 믿으며.


진동

충격

분리

파괴


그날까지 나는 꾸준히 진동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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