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그동안 나를 버리고도 연락 한번 없는 무정한 엄마였지만 그래도 찾아가 보자. 어쩌면 살길이 열릴지도 몰라!
부질없는 희망이 되더라도 용기를 내어 찾아간 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나 아버지한테 버림받을 만한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은데...
수도세를 내고 나면 가스요금이 기다리고 있었고 가스요금을 내고 나면 쌀을 사야 했고 거침없이 먹어대는 아이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선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글을 써야 했고 기획안은 기필코 투자자를 잡아야만 살아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그런 내게 황 대표는 거침없이 다가섰다.
"왜 김 작가는 한 번도 페라리를 태워달라고 말하지 않아요?!"
함께하는 여자 작가들과 경리를 보는 미스 리는 걸핏하면 황 대표에게 페라리를 한 번이라도 더 태워 달라고 때를 쓰기도 하고 커피를 서로 타주며 드라이브를 하려고 눈치싸움을 하곤 하였다.
"그걸 탄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왜 꼭 내가 페라리 태워 달라고 해야 되나요?!"
내 질문에 당황을 했는지 그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언제든 말만 하면 뭐든지 태워 준다고 하였다.
사실 그는 페라리뿐만 아니라 아우디도 벤츠도 있는 잘 나가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왜 나 같은 것을... 뭐가 부족해서?!
"장난이 하고 싶다면 하지 말아 주세요!"
단호한 나의 말에 그는 음식을 잘하는 여자가 좋다며 옛날부터 음식 잘하는 여자는 소박을 안 당하는 법이라고 하였다.
피식, 나는 그의 진담인지 아니면 실수인지 모를 그 말에 실소를 터뜨렸고 이미 소박을 받다 못해 이혼까지 했다고 말하였다. 일순간 얼어붙은 분위기, 팀장이 얼른 끼어들어 화제를 바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그 우스갯소리에도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 어묵볶음이 맛있어요. 더 없어요?!
-고추장찌개도 예술이네.
- 오올~
탄성과 함께 야릇한 눈길을 보내는 직원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면서도 굳이 내 옆에 앉아 있는 직원과 자리를 바꾸면서 대놓고 다가오는 그였다.
그 후에도 내가 가끔 식사 당번이 되어 직원들 밥을 하는 날이면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어김없이 나타났었고 두세 그릇을 거뜬히 비웠으며 공짜 밥은 안 먹겠다며 설거지를 돕기도 하였고 아니면 그날 저녁을 거하게 직원 모두에게 쏘고는 하였다.
그 덕분에 나는 동료들에게 심심찮은 치사를 듣기도 하였다. 그렇게 가깝지도 않고 멀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시간들이 바람처럼 한 여름을 지났고 가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의도하지 않았던 몇 번의 우연한 만남으로 둘이서 차를 마시기도 하였고 돌담을 걷는 시간도 있었다. 그 사간을 통해 알게 된 그는 딸아이가 하나 있었고 술과 춤에 혼을 판 아내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그가 내게 말했다.
" 아이를 위해 새벽 세시까지 일을 하고도 집으로 달려가는 여자라면 평생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얼마 후 그 일이 일어났다.
황 대표와 다른 투자자를 만나게 되어 그동안 기획사 직원들이 애쓰던 결심을 맺었던 날이었다.
한꺼번에 여섯 작품을 투자를 받게 되어 선수금을 받던 날 팀장과 소속사 직원 모두와 회식을 하였다.
일차는 고깃집에서 배가 터지도록 소고기를 먹었고 이차는 당연히 압구정동의 의리 번쩍한 클럽이었다.
홀에서는 선남선녀가 춤을 추었고 룸에서는 밴드에 맞춰 노래 부르고 음식도 먹을 수 있는 태어나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다들 들떠서 폭탄주를 마셔 대었지만 나는 술을 먹지 못해 몰래몰래 버리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잠이 들 땐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김 작가 꿈!"
"....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언제든 콜!"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후렴처럼 가사마다 대구를 하는 황 대표였다.
그런 황 대표의 반응에 직원들이 갑자기 그의 편을 들며 이제는 그 마음을 받아주라며 아우성이었다.
못 들은 척 취하지도 않았는데 취한 척하며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못 추는 춤까지 추어가며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를 쓴 덕분에 더 커지지 않고 다행히 잘 넘어갔었다.
밝은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고 기분에 흠뻑 젖은 직원들은 빠르게 술에 취해갔다.
새벽 4시가 돼서야 겨우 끝난 술자리.
직원들은 오랜만에 집으로 간다고 다들 난리였고 팀장은 할증료까지 챙겨서 직원들의 차비를 챙겨 주었다.
나도 당연히 차비를 주겠지 했었는데 차비 대신 황 대표가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음주운전은 안된다며 구실을 찾는 나의 등을 떠미는 팀장님과 직원들.
어느새 나를 에워싸고 그의 아우디로 가고 있었다.
그 차에는 운전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나의 집을 알고 있었는지 동네 이름을 말하며 그곳에 가면 되냐고 확인까지 하였다.
차문을 열어주며 등 떠미는 직원들 사이에 있는 그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는 명쾌하게 자기는 앞에 탈 거라고 하였다.
혹시나 몰라 나는 자리를 양보하여 안쪽으로 비키지 않았고 그는 말대로 앞자리에 탔다.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우리들에게 팀장과 직원들은 좋은 시간을 보내라며 응원을 보냈다.
긴장한 채 그의 뒷모습을 보며 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차가 다른 길로 들어섰고 가는 방향이 바뀐 것을 알고 나는 어디로 가냐로 물었다.
"잠깐, 한강 바람이나 쐬고 가죠... 술도 깰 겸."
차가 미끄러지듯 한강에 멈추어 섰다.
앞자리에 탔던 그가 서둘러 내려서 문을 열어 주었다.
뿌연 물안개가 피어 있는 강가에 불빛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안개에 젖듯이 내 마음이 묘하게 일렁거렸다.
"아~"
탄식처럼 나오는 나의 한숨, 그 한숨 속에는 그동안 사느라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새로 보이는 별빛과 늦은 밤에도 데이트를 하고 있는 쌍쌍의 연인들,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강물로 비치는 불빛. 이런 것을 느끼며 살았던 적이 언제인지 모른다.
물안개가 지친 내 몸을 감싸 안아 주었고 불빛에 반짝이는 강물은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삶의 무거움을 잠시나마 대신 받아 주는 듯하였다.
옆에 그가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했었는데...
"나 한번 믿어 볼래요?!"
언제 다가왔었는지 황 대표가 옆에 서 있었다.
난, 남자를 믿지 않아요...라고 말을 했던가?...
그는 일하느라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행복과 딸아이의 행복을 위해 재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혼을 하고도 정신 차리지 않고 여전히 술 마시고 춤추느라 아이를 돌보지 않는 여자에게 더 이상 자신의 딸을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고.
아, 이 남자.... 이 남자는 내 아버지와 전 남편과 달리 아이를 생각하는구나!
순간 느낀 작은 감동이었다.
그의 손이 나의 어깨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그냥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남자품에 안길까?!'
그 순간, 내 몸속에선 작은 파도가 일렁이더니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입은 마르고, 목에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술도 달아오른다.
그가 흔들리는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과감하게 다가왔다.
신음처럼 그가 내 이름을 처음으로 불렀다.
누군가에게 내 이름을 이처럼 다정하게 불려진 지가 얼마만인지... 감미로웠고 그 때문이었는지 주전자에서 끓는 물처럼 어느 순간 내 육신에 들끓는 욕망이 보여 눈을 감았다.
그의 입김이 내 얼굴에 입술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이대로 그를.... 받아들이면... 된다!
"엄마, 나 좀 만나줘!"
왜 그 순간 내 울부짖음이 들린 것일까...
그의 입술이 너무 뜨겁게 느껴지는 짧은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밀쳐내었다.
"나는.... 안.. 되겠어요..."
뒤돌아 선 나는 새벽에 이슬을 맞고 바람을 피우고 돌아오는 여자처럼 흩어진 마음과 몸을 추스르며 차에 올라타고 말았다.
깊은 침묵이 무겁게 나를 누르고 그 무거움에 벗어나고 싶은 조급함에 시달렸다.
우리 동네 입구에 다 다르자 마침 신호등에 걸려 차가 멈춰 섰다.
나는 그 무거운 침묵을 벗어던지고 서둘러 차에서 도망치듯 내렸다.
놀라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접어들면서 잠깐 안겨 있었던 그의 품에서 들리던 심장소리가, 그의 굵은 팔의 압박이 느껴졌고 나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빵!"
클락션 소리가 크게 울리고 그의 차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차문을 열고 그가 뛰어내렸다.
"어디 가요?!"
"...."
"지금, 어디 가요?!"
"...."
멍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의 물음이 무엇인지 나는 아는데...
가지 말라는 소린 걸 아는데 나는 그가 원하는 답을 해 줄 수가 없다.
나는, 엄마처럼 아버지처럼 아이들을 버릴 수가 없다.
"지금, 어디로... 가나고요?!"
"아이들... 한 테.. 가요! 내 아이들한테요."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그가 말이 없다.
그런 그를 뒤로 하고 집으로 걸어갔다.
그는 자꾸만 내 뒤를 따라온다.
집이 코 앞이었다.
"대표님의 마음... 알겠지만... 저는 제 아이... 만으로도 지금.. 너무 벅차요... 죄송합니다."
그의 다른 어떤 말이 내 발목을 또 잡아챌까 봐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었다.
제발 이대로 가주길... 아니, 그가 와서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려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길게 클락션을 울리더니 부르릉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차가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이제, 끝났구나.
갑자기 맥이 탁 풀려 주저앉는데 속울음이 울컥울컥 치받쳐 오른다.
아이들이 내 울음소리에 깰까 봐 욕실에 들어간 나는 옷을 입을 채로 더워진 몸을,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안감힘을 쓰며 찬물을 뒤집어썼다. 눈물인지 눈에 들어간 물이 흐르는 것인지 한동안을 그렇게 버티듯 서 있었고 차가운 물에 몸이 굳어지고 나서야 겨우 마음이 진정되었다.
잠옷을 갈아입고 안방에 들어가니 아이 둘이 가운데 내 자리를 비워놓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를 많이 닮은 큰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 제발 나 좀 만나 줘!"
나를 닮은 큰 아이의 얼굴에서 비 오는 날 외삼촌 집 앞에서 오들오들 떨며 엄마가 나오길 기다렸던 내 아픈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너희를 지켰어!"
핑, 눈물이 돌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나는 아이들이 마련해 놓은 자리로 들어가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작은 아이가 잠결에도 가슴을 더듬어 조물거리고 큰 아이의 편안한 얼굴이 내 턱 밑에 있다.
'잘한 거야!... 너, 참 잘했다.'
창밖에 돋아 오르는 햇살 속에 아직도 제 빛을 잃지 않은 달을 보며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년 반이 지난 후 엄마는 나를 찾아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