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해방촌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큰 도시에 갔을 때 walking tour(워킹 투어)를 많이 한다. 현지인의 설명을 들으면서 도심의 관광 명소들을 구석구석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또 번화한 도심에서 우리는 Pub Crawl을 즐길 수도 있다. Pub Crawl은 여러 펍을 다니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말하는데 한번쯤 도전해 보면 좋다.
세계 각지의 청년 여행자들이 모이는 호스텔에서 이벤트를 많이 추진하는데, 이때 여행 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도시의 밤 분위기를 느끼고 싶을 때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한다. 단, 이런 문화는 어릴 때 경험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셰어하우스의 그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던 나는 쩌멜리와 함께 금요일 밤만 되면 자연스럽게 이태원에서 pub crawl을 하게 됐다. 이태원의 특성답게 세계 각국의 각 나라별 테마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펍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다른 분위기의 펍을 발견하는 것이 쏠쏠한 재미라면 재미였다. 많은 펍들 중에서 쩌멜리와 나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펍이 있었으니, 바로 거긴 caliente라는 곳이었다.
Caliante(깔리엔떼)는 스페인어로 뜨겁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의 hot과 비슷한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난 왜 스페인어를 마음에 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스페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학원을 등록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뭐 특별한 목적 없이 배웠기에 중간에 그만두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스페인어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리는 나를 보며 내 안의 라틴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특히, 라틴음악을 들을 때 난 평소 느낄 수 없었던 전율을 온몸으로 느끼며 흥분 상태가 된다.
이태원 중심에 위치한 깔리엔떼 펍에 처음으로 갔을 때 난 이런 기분을 느꼈다. 깔리엔떼는 라틴음악이 나오는 펍이었고, 살사를 추는 살사 바였다. 바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면서 나오는 음악을 듣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마저 느꼈다.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쩌멜리와 나는 그곳의 단골이 되었다. 춤을 추지 않아도 바에 앉아서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어쩜 그렇게 독특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만 모이는지, 비주얼과 의상으로 봐선 우리가 그중에 제일 평범했다. (이건 우리만의 생각일 수도….)
그곳을 알게 된 이후, 우리는 금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무대 한쪽에서 라틴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막대기 같은 나보다 훨씬 리듬감이 좋은 쩌멜리는 옆에서 웨이브를 타고 있었다. 그동안 춤을 배우려고 도전했던 이력만 본다면, 그리고 꾸준히만 했다면 아마 지금쯤 박사 수준이었을 것이다. 재즈 댄스, 그리고 스윙 댄스와 살사 댄스 등 시도는 많이 했었지만 난 춤은 나와는 맞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각종 춤을 배우기 시작할 때마다 같이 참여했던 쩌멜리는 내가 그만 둘 때도 계속해서 춤을 췄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곳에서 자신의 섹시함을 어필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난 춤을 추려고 움직이기만 하면 코미디가 되어 버린다.
스윙댄스나 살사댄스는 혼자 추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함께 추는 춤이다. 춤을 리드해 나가는 사람을 리더, 그리고 함께 추는 사람을 팔로워라고 한다. 춤을 시작하기 전에 파트너의 손을 잡는 자세를 ‘홀딩’이라고 한다. 리더와 팔로워는 앉아 있는 사람에게 홀딩 신청을 해서 함께 춤을 출 수 있는데 홀딩 신청을 했을 때는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고 춤에 응한다. 리더가 이끄는 대로 팔로워는 춤을 추게 된다. 팔로워는 춤을 잘 추지 못해도 잘 리드해 주는 리더를 만나면 신나게 즐기며, 잘 추게 보일 수도 있다.
그날도 쩌멜리는 홀딩 신청이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누가 봐도 폐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는 홀딩 실천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움직이는 것보단 앉아서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기도 했다. 간혹 홀딩 신청이 들어오면 “잘 못 추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리고, 춤을 춘다. 처음에 리더들은 괜찮다고 했지만, 한 곡이 끝나고 더는 나에게 홀딩 신청을 하지 않는다.
난 다시 관람자의 모드로 들어간다. 그곳엔 남미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배운 대로 원, 투, 쓰리, 포 박자에 맞춰 아주 정직하게 춤을 추는데 반해 남미 사람들은 소위 자기 꿀리는 대로 춤을 추는 것 같다. 제멋대로 추는 거 같은데 뭔가 흥이 나고 있어 보인다. 실제로 남미 사람들과 춤을 출 때가 더 재미있단 느낌이 든다. 뭐든 정석대로 하는 것보다 마음 꿀리는 대로 하는 게 스릴 있는 법이니까.
혼자 외롭게 앉아 쩌멜 리가 춤추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나에게 홀딩 신청을 한다. 남미 사람이었다. 한국인 특유의 겸손함을 장착하고 난 춤을 잘 못 춘다는 것을 어필한다. 그리고 우린 춤을 추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동안 찔끔찔끔 배웠던 스페인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이 날을 위해 내가 그동안 배웠었구나. 책으로만 배웠는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스페인어가 술술 나오더니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를 한참 하고 그는 나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뭐 얼마나 연락을 하겠어.’하는 심정으로 연락처를 자연스럽게 교환하고 우린 헤어졌다. 그 이후 계속 연락을 주고받다가 우린 자연스럽게 만남을 이어갔다. 그리고 연인이 되었다. 1년 정도의 시간을 만났던 것 같은데 지금 그의 이름을 떠오르려고 하니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으 이름이 영어의 쉬림프 발음과 비슷해서 새우라고 불렀던 기억밖에는…. 딱 그 정도의 인연이었나 보다. 그냥 가볍게 만났던 딱 그 정도의 인연.
어떤 기억은 떨쳐 내려고 해도 떨쳐지지 않는 반면, 아무리 떠올려봐도 생각나지 않는 기억이 있다. 바람과 같이 왔다 스쳐간 그런 인연들. 떠올리면 흐뭇해지는 지나간 인연이 얼마나 될까. 그 당시엔 내 곁에 없으면 큰일 날 거 같은 사람이었는데도, 지금은 그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그런 추억이 있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어쩌다 고개를 들이밀며 봐달라고 용을 쓸 뿐이다. 지금 라틴 펍 깔리엔떼는 사라졌다. 바람과 같이 왔다 스쳐간 나의 연인처럼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