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해방촌
셰어하우스의 그녀가 독일로 떠나고, 다시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잠깐 나와 있겠다고 했는데, 내 방에 점점 짐이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 방은 햇빛이 들지 않아 이 김에 햇빛이 잘 드는 방으로 옮기겠다고 솔지에게 말했다. 햇빛이 드는 방은 지금 있는 곳보다 더 넓어 3만 원을 더 내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방에서 방으로 이사가 이루어졌다. 옷장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던 나의 옷들은 이곳에서 4계절을 지내면서 어느덧 부족했고, 난 이사를 하면서 서랍장과 행거를 추가했다.
이곳에서 내가 4계절을 지낼지 몰랐다. 사실 내 집에 살고 있는 언니에게 변화가 생겨 다시 들어가든, 아니면 나의 삶에 변화가 생기길 바랬다. 하지만 그 변화만을 바라며 오늘을 잘 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난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의 삶을 꾸려가는 중이었다. 변화라는 게 혼자만의 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고, 난 그때 투잡을 하면서 공부까지 하고 있었다.
어느덧 2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고, 난 그때 다시 학교를 들어가 뮤지컬을 공부하고 대학로에서 뮤지컬 조연출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이어 대학원에 가서 학업을 계속 이어가려고 했다. 그러던 와중에 영국 석사 과정을 알게 되었고, 영국 석사는 1년이면 딸 수 있다는 사실이 메리트로 다가왔다. 영국으로 석사를 하러 가려면 아이엘츠(IELTS) 점수가 필요했다. 아이엘츠(IELTS)는 영국이나 호주 등의 학교에서 유학을 할 때나 이민을 갈 때 필요한 영어 점수이다.
그리하여 난 아주 바쁜 생활을 하게 된다. 오전에는 학원을 등록해서 영어 공부를 하고, 낮에는 초등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영어 뮤지컬을 가르쳤다. 그리고 학교 일이 끝나면 바로 공연장으로 가서 밤까지 일을 했다. 열정과 체력 모두 가능한 나이였다.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이 유독 빨리 가는 것을 느낀다. 그러던 와중에 나에게 아주 달콤한 제안이 들어왔다.
매 년 가을에 독일 베를린에서는 ‘세계 국제 가전 전시회’가 열린다. 말 그대로 전자 제품 전시회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모여 언팩 행사도 하고, 그곳은 전자 제품 축제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채워진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매년 참여를 하는데, 기업들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현장 소식을 스트리밍 서비스로 내보낸다.
그 현장의 방송을 위해 작가가 필요했고, 아는 PD님께서 제안을 해주셔서 난 일 년 전에 출장을 다녀왔었다. 아마도 그때 담당자들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미 일 년이 지나 있었고, 그 기업에서 또 제안을 해 온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영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그 행사 참여 이후였던 것 같다. 당시 MC가 영국 사람이었고, 내가 MC와 함께 다니면서 촬영을 진행했었는데, 그때 나의 한계와 필요성에 대한 부분을 동시에 아주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날 찾아주는데 그 기회를 버릴 순 없었다. 타이밍도 좋았다. 이때가 한국을 떠나 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에서의 출장은 10일 정도였지만, 난 그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바로 영국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치밀하게 준비한 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뭐 어떻게든 되겠지란 마음이었다. 그때 한국에서 너무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어서 떠나기 전까지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정리할 것들은 정리했다. 그동안 정들었던 학교도 그만둔다고 얘기하고, 조연출도 물론 그만두었다. 그때만 해도 마음은 굉장히 비장했다. 떠나는 전날까지도 난 짐을 싸지 못해서 떠나기 전 날 밤을 새우면서 부랴부랴 짐을 쌌다.
한국에서 시험을 봤던 아이엘츠 점수는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정도로 나오긴 했다. 그 후 모든 건 영국에 가서 결정할 생각이었다. 일이 우선이었기에 다른 것들은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가서 몸으로 부딪혀야지. 정신없이 정리하고 비행기를 타고 나서야 드디어 떠난다는 걸 실감했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셰어하우스에 잠깐 나와서 살려고 했는데 벌써 1년 6개월이 지나 있었다. 내가 떠나기 전날까지 한국에서 세계 조정 선수 대회가 열렸었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내가 탄 비행기에 다 타고 있었다. 서로 아는 분위기여서 그런지 비행기 안은 굉장히 시끄러웠다. 그런데 난 그 시끄러움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게 신의 한 수였는지도 모른다. 난 비행기에 타자 마자 거의 기절하듯 잠이 들어 내리기 전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잠에서 깨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환경은 가만히 있는데 변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어떤 갈망이 들고, 그 갈망으로 인해 행동을 하고, 행동으로 인해 환경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언니와의 불편함으로 인해 난 셰어하우스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행동에 옮겼다. 그리고 나에게 또 다른 환경을 바꿀 기회가 온 것이다. 사실 난 오래전부터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단 생각을 해왔었다. 예전부터 간직하고 있던 나의 소망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왕이면 오래오래 해외에서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살짝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