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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티 Feb 01. 2024

할머니댁에서 보낸 따스한 겨울방학

90년대생 엄마의 첫 육아일기


아기가 6개월쯤 되니 무언가를 기록할 시간이 점점 더 없어진다. 아기가 뒤집기를 넘어서 이젠 기기 시작했고 틈만 나면 베이비룸 울타리를 탈출하기를 시도한다. 호기심이 많고 활동적인 아이라 앞으로는 또 어떤 나날들이 펼쳐질지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기대가 된다. 6개월에는 남편의 긴 출장으로 시댁에 3주라는 긴 시간 동안 머물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지내다가 시댁이랑 사이가 안 좋아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나 3주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은 그 시간이 너무 그립고 생각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록해 두면 더 오래오래 보고 추억할 수 있겠지. 나도 좋고 아기도 좋았던 시댁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해 본다.



사실 시댁에 가서 내 부족한 모습을 보일까 봐 염려가 된 부분이 많았다. 아침잠도 많고 게으른 모습이 어머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그런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어머님께서는 아침에 나보고 더 자라고 아기를 데리고 나가 아침 수유를 해주시고 아버님은 아침에 아기와 신나게 놀아주셨다. 그 틈에 나는 새벽에 틈틈이 아기가 깨느라 못 잔 잠을 보충하고 그렇게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이 일어나신 지 한 시간 뒤쯤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면 아침 샐러드가 준비되어있다. 슈퍼푸드는 다 들어가 있는 듯한 샐러드. 너무 맛있어서 더 리필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나서는 어머님과 아기와 함께 인간극장과 아침마당을 봤다.



어머님댁에 와서 가장 좋았던 점은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아기랑 함께 있다 보면 운동은 자연스레 후순위가 되고 남편에게 맡기고 가려고 해도 어쩐지 그게 잘 안된다. 그런데 어머님댁에 오니 어머님이 운동을 하고 체력을 기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3주간이지만 생애 첫 PT를 해볼 수 있게 되었다. 1:1 레슨으로 뭉쳐있던 내 목과 어깨는 보다 편안해졌고 헬스장의 기구 사용법도 익혀서 헬스장이 이전보다 친숙한 곳이 되었다. 이렇게 체력이 길러지니 육아가 이전보다 덜 힘들고 스트레스도 덜 받게 되었다.



운동을 다녀오면 점심시간이라 어머님께서 밥을 해주신다. 이것저것 해주시는 게 죄송해서 설거지는 내가 하려고 하는데 그마저도 놔두라고 하셨다. 애 보는 게 쉬운 게 아니라며 잘 먹고 잘 쉬라고 해주시니 너무 감사했다. 잘해주시는 것도 감사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게 더할 나위 없이 감사했다.



6개월은 이유식을 시작하는 시기라 어머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어머님이 어린이집 조리사로 오래 근무하시기도 했고 이유식을 처음 하는 나로서는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시작은 토핑이유식으로 했는데 큐브를 만드는 게 처음에 너무 어려웠다. 찌고 갈고 얼리는 과정이 생각보다 손이 너무 많이 갔다. 그래도 어머님이 채소를 쪄주시고 나는 갈기만 하면 되어서 한결 수월했다. 첫 시작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 시작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감사할 것이다. 나는 그 대상이 내가 예상치 못한 시어머니가 되어서 놀랍고 신기했다.



어머님은 내 휴식을 위해서 대중목욕탕도 보내주셨다. 잘 가지 않는 대중목욕탕이지만 어머님이 권하시니 오랜만에 가보고 싶어졌다. 나는 외출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데 시댁에서도 그렇게 있다 보니 어머님께서는 며느리가 콧바람도 좀 쐬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를 내보내주셨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게 어떤 일이 있지 않으면 아기를 키우는 입장에서 밖에 나갈 일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어머님은 이런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나를 쉬게 해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 마음에 감사했다.



시댁에 와서 우리 아기는 빡빡이가 되었다. 조금 더 일찍 잘라줬어야 했는데 긴 머리가 잘 어울려서 그대로 뒀더니 눈을 찔러서 머리를 자르게 되었다. 앙앙 우는 통에 조금만 자르려던 머리를 다 밀어버렸다. 처음엔 배냇머리가 사라지니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다 밀고 보니 세상 귀여운 아가가 되었다.



어머님댁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은율이의 6개월 예방접종을 하러 어머님댁 근처 병원에 어머님과 함께 갔다. 혼자 가면 당황했을 텐데 이렇게 같이 가주시니 감사했다. 의사 분이 물어보지도 않으셨는데 우리 손자예요~ 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귀여웠다.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 우리 남편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따스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다. 어쩌다가 내가 이런 귀한 사람들을 만나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는지..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번 겨울은 은율이에게는 따뜻한 할머니의 품을, 나에게는 지난 겨울방학들을 되새기게 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집에 오고 나니 나는 그 시간들이 참 그리운데 어머님과 아버님은 그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지내느라 힘드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이 감사함을 갚을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날이 오면 나도 최선을 다해 시부모님을 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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