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과 내가 함께 하는 취미생활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 섭렵(?)하기. 그중에서도극장에서큰 스크린으로 본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Coco)'가 우리 딸에게는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코코'를 본 이후로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부쩍 많이 한다.
"아빠!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씸씸이 보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씸씸이가 떼 안 부리고 아빠 엄마 말 잘 듣는지 다 보고 있어요?"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코코'는 사후 세계의 신비스러움으로 어른들에게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할아버지는 3년전 우리 딸의 돌잔치를 3개월 앞두고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으셨다. 그리고 9개월 간 힘겨운 투병 생활 끝에 꿈 같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직업이 사람 만나는 일인지라 감정 통제와 표정 관리가, 아버지의 투병 생활을 함께 하던1년간 나에게는 많이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월드컵 응원을 하는 듯 보였는데 같이 기뻐할 수가 없었고, 세월호 참사 뉴스를 보는 듯했지만 같이 슬퍼해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내가 내 감정대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아내 그리고 딸과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도 갓 첫돌이 지난 아기의 그 작고 통통한 손으로 아빠 얼굴을 어루어 만져주던 감촉이 잊혀지지 않는다. 상처 난 마음을 치유받는 따뜻한 느낌이었다.
아이가 커 가면서 그 '작고 통통한 손'은 함께 자라겠지만, 그 때의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던 따뜻함은 계속 기억에 남을 듯 하다.
완치율이 극히 낮은 췌장암 선고를 받고도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거의 매일 병원에서 회사로 출퇴근하다시피 했고, 마음이 너무 힘들어지면 아내와 딸을 보러 집에 가곤 했다. 주변에서는 간병인을 쓰라고 했지만 아버지 혼자 죽음 앞에서 외롭게 싸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이 싸워드리고 싶었다.
병원 입원 4개월 즈음, 그날도 여느 날처럼 아버지는 나의 부축을 받으며 병동 복도를 휠체어에 기댄 채 걷는 중이셨다. 소파에 잠시 앉아 쉬면서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는 창문 밖을 내다보시면서 나지막한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가서 저 비 다 맞고 서 있으면 시원하겠다..."
꼭 퇴원하셔서 건강한 몸으로 저 비 다 맞게 해드리겠다던 약속을 나는 지키지 못했다.
온 가족이 매달렸던 1년,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심리적으로 많이 힘든 시간이었다. 암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어느덧 사십 대를 눈 앞에 두고 나는 아버지 닮았다는 이야기를 전보다 많이 듣게 되었다. 마지막 췌장암 수술을 앞두고 아버지는 겉으로 내색은 안 하셨지만 불안하셨는지 당신이 살아온 지난날들을 마치 영화처럼 밤새 나에게 이야기하셨다.
아버지는 평일에도 아침, 저녁 식사는 항상 네 식구가 함께 둘러앉아먹어야만 하셨고 (사춘기 때는 아버지 퇴근 후에야 늦은 저녁을 먹는 게 싫다는 이유로 반항도 많이 했었다.), 80년대 당시 집 한 채 값의 큰 비용을 들여서 어머니와 단 둘이 흔치 않은 유럽 여행도 가실 정도로 낭만적인 면도 많은 분이셨다. 돈 많은 부자는 아니셨지만, 모험심 강하고 가정적이며 책임감도 강한 분이셨다. 그 책임감 뒤의 외로움이 보여서 마지막 모습이 더 안쓰러웠던 것 같다.
암 선고 직전 해에 아버지는 사업 실패와 더불어 가장으로서의 자존심에도 많은 상처를 받으셨다. 때로는 너무 고통스러우신 나머지 남몰래 우시는 모습을 우연히 보기도 했지만그래도 우리 곁에 항상 계셔주기를, 암 따위는 이겨내 주시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리 가족 모두 자신도 모르게 서로 조금씩 지쳐갈 때 즈음, 우리들각자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헤어지던 그 날, 나는 아버지 이마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 아들로 태어나고 싶어요. 행복했습니다. 아버지. 감사하고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