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실에서 보이지 않는 손님들의 설렘
이제는 정말 과거가 된 것 같은 코로나다. 겪고 있는 동안에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끝나고 먼 과거가 될 일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뭐 어쩌겠어. 이미 불안과 공포에 지치고 유튜브처럼 10초씩 건너뛸 수도 없어서 막연히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버티고 또 버텼던 시간이다.
아직 후유증이 있긴 하지만
요파야, 지금 많이 놀러 다녀
지금 돈이 좀 부족해도 나중에는 시간이 없고
비행기 자리가 없다
굳게 닫힌 해외여행의 문이 조금씩 열리던 2022년, 기장님들께서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다. 당시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여행을 가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기장님의 말씀이 맞았다. 흔히 항공사 직원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복지가 저렴한 항공권이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은 날에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다. 손님들이 타지 않는 남는 자리를 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약은 당연히 안 되고, 일본을 가려고 했다가 동남아를 가게 되는 랜덤게임이 가능한 시스템이기도 하다.
기장님의 말씀처럼 항공권의 가격이 오른 덕(?)에 빈자리가 넉넉하게 있었고 당시에는 내가 원하는 날에 원하는 도시를 갈 수 있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던 탓에 해외여행을 미루고 미뤘다.
이제는 제발 여행을 가자
알 수 없는 이유로 비행 한 개가 없어지면서 나에게 무려 5일의 시간이 생겼다. 이건 기회라고 생각했고 당장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 빈자리가 있는 항공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디는 가기로 했다. 하지만 성수기의 막바지인 터라 큰 결심 없이 갈 수 있는 일본과 동남아에는 자리가 없었다. 운이 좋아 가더라도 돌아오는 비행기 표가 없어 한국에 못 돌아오는 것은커녕 출근하지 못하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일본은 자리가 없다.
가까운 대만도 자리가 없다.
다른 동남아는 글쎄...
갑자기 머리를 스친 도시가 생각났다.
그렇게 나는 시드니에 다녀왔다.
2박 3일 빡. 세. 게.
입사 후 처음으로 손님이 되어 비행기를 탔다.
손님 여러분, 곧 이륙하겠습니다.
띵- 띵- 띵- 띵-
이륙을 알리는 벨소리와 승무원님의 안내방송이 나오는 동안 항공기는 활주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활주로 중심선(Runway Centerline)과 나란히 정대된 항공기는 잠시 멈추더니 큰 소리를 내며 이륙하기 시작했다.
손님 여러분, 자리에 앉아 계실 때는
좌석 벨트를 착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 언제 들었을지 모르는 잠에서 깼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앞자리에 앉은 분의 스마트폰과 손이 비행기 창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작고 둥그런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과 태평양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새파랗고 과자 부스러기 같은 구름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카메라 소리가 스륵스륵 나더니 이윽고 창 밖 풍경을 찍는 다른 사람들의 스마트폰들이 창문 가까이로 가고 있었다. 내려져 있었던 창문 덮개가 올라간 틈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비행기 안은 잠시 밝아졌다.
저기 혹시
옆 자리 노부부께서 나를 부르셨다. 입국 세관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데 어려움이 있으신 듯했다. 한국으로 들어가는 세관 신고 서류는 없어진 지 오래지만, 아직 세관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국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 어.로.
미안한데, 이것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요. 여권이랑 패키지여행 안내장 같은 거 있으면 보여 주세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비행이었지만, 이때를 시작으로 두 분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혼자 여행 가는 내가 부럽다는 이야기에 친구분들이랑 패키지여행으로 가신다는 이야기로 받아치며 티키타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류는 완성되었다.
아직 아무 도장도 찍히지 않은 파란색 여권 두 개
여러 번 읽어 본 만큼 모서리가 닳아 있는 패키지여행 설명서
여기에서 두 분의 설렘이 느껴졌다.
나는 비행기 타면 설레던데, 너는 아니겠다
친구들의 말에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는데 달랐다. 회사에 들어오고 부기장이 된 뒤 처음으로 탄 비행기에서 나는 뭉클한 기분을 느꼈고, 나의 설렘에 손님들의 설렘이 얹히는 기분을 느끼며 돌아왔다.
창 밖 풍경을 찍는 창가 손님들
창가 손님들에게 사진을 부탁하는 복도 쪽 손님들
비행기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꼬마 손님들
일행들과 셀카와 동영상을 남기는 손님들
마지막 만찬처럼 신중하게 기내식을 고르는 손님들
유튜브로 여행지 영상을 보고 있는 손님들
짧은 여행에서 열심히 다녔던 관광지와 와인 한 잔을 마시면서 봤던 야경만큼 비행기에서 느꼈던 다른 사람들의 설렘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것들이라도 일이 되면 피곤해지는 것처럼 비행도 그런 부분이 있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느낌과 예쁜 하늘은 익숙해지고, 누군가의 설렘보다는 울고 있는 아기 손님과 다른 손님들의 컴플레인들, 그리고 피로감이 압도하는 시간들이 있다. 해외에서 머무는 비행을 가더라도 출근 시간을 기준으로 휴식 시간을 먼저 생각하고 비행 준비를 하다 보면 운동과 식사는 호텔에서 해결하고 별다른 구경은 잘 안 하게 된다.
그렇게 비행이 익숙하고 업무가 된다.
그런데
다시 손님으로 타는 비행기에서 마주했던 나와 다른 사람들의 설렘을 느껴보니, 내가 일할 때도 조종실에서 보이지 않지만 손님들이 비행을 각자의 방법으로 즐기고 계시겠다는 생각을 했다. 슬럼프도 아니었는데 리프레시되는 기분이 들었던, 마음이 더 차분하게 비행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그 뒤로 비행이 더 재미있고 감사하고 몰입하게 되는 일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내일 비행 준비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에필로그:
'부기장님, 긴가민가 했는데 맞네요.'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니, 아는 승무원 분께서 인사를 건네어주셨다.
'혼자 오셨어요?'
'네'
(잠시 정적)
'며칠 가세요?'
'이틀 정도요, 수요일에 가요. HOXY...?'
'저희랑 같은 비행기로 돌아가시네요. 재미있게 놀고 오세요.'
맥주가 마시고 싶었는데... 참았다.
부탁드리기 죄송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