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못의 레슬링 겉핥기 - 1
‘로만 제국’하면 대부분의 스포츠 팬들은 아마 EPL의 첼시를 떠올릴 것이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의 머니파워로 2000년대 중후반 큰 영광을 누린 첼시는 EPL의 강호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로만 구단주의 과다한 야망으로 선수 영입에서부터 운용까지 감독의 권한을 침범하기 일쑤였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감독을 여러번 갈아치우기도 했다. 이렇게 로만 구단주의 영향력이 매우 큰 첼시에게 축구 팬들은 ‘로만 제국’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그러던 2015년, 원조 로만 제국 첼시가 잠시 주춤한 사이 바다 건너 미국에서 또 다른 로만 제국이 탄생했다. 하지만 축구팀 첼시와는 케이스가 조금 다르다. ‘로만’이라는 사람은 구단주도 아니고 선수일 뿐인데다 그 선수 개인이 직접 그 팀을 좌지우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이 팀, 아니 이 회사에서 로만은 이례적인 호사를 누리고 있다. 이 신흥 로만 제국이라 불리고 있는 이 회사는 레슬링을 본업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WWE(World Wrethling Entertainment)다.
▲ 온갖 방해를 뿌리치고 챔피언 벨트를 따낸 로만 레인즈. 챔피언 벨트가 걸린 지난 '로얄럼블 2016' 30인 로얄럼블매치에서도 등장 순서 1번, 리그 오브 네이션스의 난입 등의 방해도 이겨내는 듯 했으나, 결국 트리플 H에게 탈락되면서 챔피언 벨트를 빼앗겼다.
2013년 ‘더 쉴드(The Shield)’의 일원으로 WWE 메인 로스터에 데뷔한 ‘로만 레인즈(Roman Reins)’는 현재 WWE 수뇌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 로만은 2015년 30인 로얄럼블에서 우승한 뒤 처음으로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 스토리 라인에 들어섰고, 15년 중반 前 챔피언 세스 롤린스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챔피언 스토리 라인에 합류했다.
그런데 로만은 여타 메인이벤터와는 다른 각별한 푸시를 받기 시작했다. 15년 후반 로만은 매 메인이벤트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를 이기기 위해서 여러 레슬러가 달려들었다. 이 때문에 2015년 후반의 메인이벤트는 한동안 로만이 여러 명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거나, 혼자서 모두를 제압하는 단조로운 스토리 라인을 반복하기도 했다. 지금은 브록 레스너라는 더 엄청난 존재가 재등장했고, 오랜 친구인 딘 앰브로스가 메인 스토리 라인에 투입되면서 로만보다는 레스너의 강함을 더 부각시키고는 있지만, 로만은 여전히 메인이벤터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레스너를 제외한 레슬러에게는 여전히 언터쳐블한 존재다.
하지만 대부분의 레슬링 팬들은 로만이 메인이벤터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레슬러로서의 경기력이 그리 뛰어난 것도 아니고, 엔터테이너로서 중요한 마이크웍(mike-work) 또한 진부하다. 그런 그에게 메인이벤터 임무가 반 년 이상 주어지자 팬들도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 사실 현재 WWE를 로만 제국이라고 칭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존 시나가 아직 건재하기 때문이다. 존 시나의 상품성이나 그의 가치는 로만이 넘보기에는 넘사벽이다.
사실 이런 엄청난 푸시는 WWE로서는 처음은 아니다. 어느새 WWE의 아이콘으로 성장한 존 시나는 무려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메인 스토리 라인을 장식했다. 타이틀 스토리 라인에는 꾸준히 등장했고, 그게 아니라면 대부분 스테이블과의 갈등이거나 더 락 같은 거물들과의 대립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존 시나 역시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오랫동안 굵직굵직한 스토리 라인을 도맡으면서 존 시나가 추구하는 것은 항상 ‘권선징악(勸善懲惡)’이었고, 조금 더 하드코어하고 신선한 스토리를 원했던 팬들은 존 시나를 점점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2006년 ECW에서 팬들에게 받은 엄청난 야유로 존 시나가 백스테이지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더 나아가 팬들은 존 시나가 등장할 때마다 그의 테마곡에 맞춰 ‘John Cena SxxK' 챈트를 외쳤고, 존 시나의 티셔츠를 패러디한 옷을 입고 관중석에서 대놓고 시나를 비판하는 팬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도 존 시나는 크게 성장해 WWE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경기력은 메인 스토리 라인을 겪으면서 더 좋아졌고, 단조로웠던 마이크웍은 야유까지도 능청맞게 받아치면서 대사의 일부로 녹여내는 여유도 보였다. 무엇보다도 링 밖에서의 성실함과 혹독하다고 유명한 WWE의 바쁜 스케줄 중에도 꾸준한 봉사활동에 임하는 시나의 모습은 팬들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또한, 큰 부상 후에도 놀라운 회복력으로 링에 복귀한 모습이나 경기 도중 코뼈가 부러졌음에도 경기를 계속 진행해 명경기를 만들어냈던 그의 모습은 아이들에게나 팬들에게 영웅의 이미지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최근 팬들은 진심 가득한 비난이 아닌, 그를 향한 애정 어린 장난 식의 챈트로 시나를 맞고 있다.
▲ 자신을 싫어하는 문구가 새겨진 옷을 입고 있는 팬 옆의 존 시나. 표정은 저래도 시나는 이를 즐기고 있다.
이런 시나의 노력은 WWE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줬다. 특히 아이들에게 영웅이나 다름없는 시나의 이미지는 곧 그의 상품 가치로 이어졌고, 그의 꾸준한 봉사활동 덕에 WWE의 대외적 이미지도 좋아졌다. 이렇게 시나의 사례로 큰 재미를 본 WWE는 경영 전략을 아예 그쪽으로 돌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009년 시청제한을 PG등급으로 내린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나도 얼마 안 있으면 나이도 40줄에 들어서고, 부상의 위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WWE 또한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고, 얼마 전 트리플 H는 인터뷰에서 “존 시나 없는 WWE를 준비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나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WWE로서 시나의 부재는 큰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로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로만이 수뇌부의 큰 푸시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팬들 사이에서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지만 그중 WWE가 ‘제2의 존 시나 만들기’ 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로만 레인스를 낙점한 것이라는 소문이 가장 신뢰성이 높다.
로만 역시 현재 권선징악의 아이콘으로 활약하고 있다. ‘어쏘리티’라는 권력에 대항했고, ‘리그 오브 네이션스’라는 단체는 애국심 강한 미국인들에게 공격하기 딱 좋은 상대를 맞아 홀로(혹은 다른 선역들과) 고군분투했다. 로만은 이 두 세력의 반대에 서서 영웅 이미지를 서서히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슈퍼맨 펀치’는 이름에 걸맞게 그의 영웅 이미지를 더 부각시켰다. WWE는 로만의 이런 이미지를 팬들에게 각인시켜 자연스레 시나의 영웅 이미지를 잇기를 바라고 있다.
▲ 권선징악 슈퍼맨 펀치!
거기에 핵심 선수들의 부상은 WWE는 로만 키우기에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현재 WWE는 선수들의 부상으로 시름을 앓고 있는데, 그 중 존 시나, 랜디 오턴, 세스 롤린스의 줄부상은 WWE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챔피언 스토리 라인을 탔던 쉐이머스도 부상으로 이탈했고, 얼마 전 대니얼 브라이언마저도 부상 끝에 은퇴를 선언했다. 현재 남아있는 선수들 중 브록 레스너나 딘 앰브로스 외에는 팬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수들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WWE는 로만을 다시 메인 이벤트 라인으로 복귀시켰다.
물론 로만이 다른 레슬러들보다 경기력과 마이크웍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WWE도 알고 있다(알아야만 해). 과거 레슬매니아 31에서 팬들의 반응을 간 보다가, 경기 직전 세스 롤린스의 캐싱인으로 스토리 라인을 급변경한 것을 보면 WWE 수뇌부들도 “아직 이르다”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영향력 있는 선수들이 부상으로 대거 이탈한 지금으로서, 로만 키우기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로만을 시나와 같은 영웅 이미지로 굳혀서 가는 것은 무리수가 아닌가 싶다. 특히 WWE는 레슬링 회사지만 결국 캐릭터 이미지로 반은 먹고 들어가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다. 과거 WWE가 큰 인기를 끌었던 것도 제각기 다른 캐릭터들이 스토리 라인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WWE가 추구하려는 영웅 이미지 또한 개성이 필요하다. 마블이나 DC의 히어로들이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착한 어린이 병이 걸린 진부한 캐릭터가 아니라 각자 개성이 넘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로만은 ‘보급형 시나’같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이것도 과한 평가다.) 큰 특색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 WWE는 총체적 난국에 있다. 상품성에만 치중하다보니 시청 제한 등급을 낮췄고, 어린 관중들의 눈에 스토리 라인을 맞추다보니 하드코어한 이미지를 최소화시켜 많은 팬들을 잃었다. 또한, 로만 키우기에만 집중한 나머지 다른 스토리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 다른 레슬러들의 스토리 라인이 산으로 가고 있다. 이는 자연스레 다른 레슬러들에 대한 활용도 문제로 이어지고, 팬들은 물론 선수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종종 제기되기도 한다. 특히 WWE가 야심차게 키워놓았다는 NXT선수들의 활용도를 보면 답답하게 느껴진다.
사실 ‘로만 제국’이라는 말은 WWE가 그리고 있는 그림일 뿐, 상품성으로 보나 팬들의 반응으로 보나 아직은 시나의 시대다. 로만이 시나의 벽을 넘기에는 한참 멀었다. 하지만 현재 WWE는 로만 키우기를 밀고 있고, 로만은 자신의 가치를 높힐 큰 기회를 잡았다. 경기력과 마이크웍 문제는 물론 팬들의 반응과 WWE의 높은 기대치는 로만이 넘어야 할 큰 산이다. 과연 로만은 제2의 시나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