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추억
백년해로를 약속한 남자친구와 5년 만나다 헤어진 친구 A가 담담하게 말했다: "2호선 서초역을 지나면 그가 매일 데려다줬던 때가 떠올라. 그와의 기억들이 내 가슴을 후벼파는것만 같아. 시간이 흐르면 잊혀질까?"
그녀는 전남자친구와 5년간 쌓았던 수많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심리 이론에 의하면, 기억하는 과정은 정보의 ‘부호화’, ‘저장’ 그리고 ‘인출’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호화’란 정보가 기억에 저장되는 형태(부호)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뇌는 시각, 청각, 촉각 등의 자극을 쉽게 기억할 수 있게 분류하고 저장한다. ‘저장’이란 신경계에 부호화 된 정보를 보관하는 과정이고 마지막으로 ‘인출’은 기억하기 위해 꺼내는 과정이다.
A는 평상시에 (전)남자친구와 2호선 다녀가면서 여러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지하철 안내 방송 소리, 옆 자리에 지그시 바라보던 그의 눈빛, A의 손가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던 그의 촉감…매 순간의 자극이 하나의 부호(형태) 혹은 꼴로 남아 저장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타인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일상생활의 추억으로 ‘기억 만들기’ 작업을 한다. 종종 얼굴 붉히며 싸우지만 결국 화해하는 ‘극적 기억’을 남기기도 하고, 때로는 평범한 하루에 타인이 그저 옆에 있는, ‘그저그런 기억’을 남기기도 한다. 드라마틱하던, 일상적이건, 모든 추억은 꼴의 형태로 영원히 저장된다. ‘인출’ 되기 전까지는 망각했다고하지만 그 꼴은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눈 앞에 나타나서 나를 과거 그 순간으로 내던진다. 이 세상에는 하찮은 기억이란 없다. 완전한 망각이란 존재할 수 없다. 1988년 장예리의 곡,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에서 “기억하지는 않아도 지워지지가 않아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기억의 꼴은 무수히 많다. 삼각형으로 세 부분의 뾰족한 부분으로 남아 가슴을 쿡쿡 찌르기도하고, 사각형으로 남아 덜 날카로우며 그나마 안정적인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A에게는 영원할 것만 같던 순간들은 날카로운 꼴로 남겨졌다. 분류되고 부호화된 감각은 아마 삼각형의 형태로 저장되었을 것이다. 드문드문 ‘인출’ 될 때마다 들리는 그의 목소리를 지우려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고 싶을테다. 이 몹쓸 꼴은 가슴 속에 뒹굴거리며 마음을 할퀼 것이다.
하지만 거친 돌이 시간이 흐르면 부드럽게 마모되듯이, 기억의 삼각형은 시간이 지나면 둥그렇게 될 것이다.
그녀는 너무 걱정할 필요없다 -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기억은 사라지게 될 테니까.
하지만 모든 기억은 고정된 꼴로 저장될까? 어떤 추억은 떠오르면 아프기도하고, 기쁘기도 하다. 그럼 이는 뾰족할까 둥글까?
어떤 기억은 태양처럼 지나치게 강렬하고 눈부셔서 형태가 안보이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 기억으로부터 버림받고 싶지 않지만 잊고싶은 양가적인 마음을 갖고있다. 이 추억은 망각과 기억이 공존하는 위태로운 곳에 존재하게 된다.
나는 석촌호수 밤길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저녁 식사 후, 그와 한 바퀴 천천히 돌면서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던 순간, 아플 때 옆에서 밤새 간호하던 순간, 주말이면 브런치 먹고 에스프레소 마시면서 지난 추억들을 공유하던 장면은 나는 망각하고 싶다.
너무나 따뜻하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아프고 아름다운 기억, 나는 이것만큼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아빠와의 이런 추억은 그 어떤 것보다도 묵직하여 돌덩어리처럼 내 가슴속에 박혀있다. 일반적인 기억처럼 일련의 부호화, 저장 그리고 인출 과정을 거치지 않아 참으로 미스테리다.
그러므로 A는 괜찮다. 그녀는 전남자친구와 추억들은 지금은 고슴도치 가시가 굴러다니듯 그녀를 미치게 고문할테지만, 적어도 형태가 있다. 영원히 잊지는 않겠지만, 각진 꼴은 어느새 곡선이 될테니 안심해도 좋다. 하지만 돌아올 수 없는 어렸을 적 아빠와의 추억, 다시 가질 수 없기에 나는 떠오르고 싶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 않다. 이는 형태가 없기에 마모되어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