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독백으로 다양한 버전해보자
하나의 독백으로 몇가지 버전으로 가능할까? 희노애락 합쳐서 최소 4가지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수도없이 많은 버전이 가능하다.
이렇게 하나의 독백으로 수많은 버전을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이유는, 어떤 배우를 만나느냐, 어떤 감독을 만나느냐에 따라 최종 버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똑같은 캐릭터, 똑같은 대사를 해도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해야한다.
그래서 한 가지 버전으로 고정시켜서 이야기하는 건 의미 없다.
배우에게 필요한 능력은 이것을 얼마나 다르게 할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능력이다.
그래서 배우란, 넘나드는 존재다. 배우란 넘나드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배우는 어떤 것을 넘나드는 존재인가?
매체를 넘나드는 존재이다. 요즘에는 예전과 달리 연극-영화-방송 등등 매체 왔다갔다 한다. 구체적인 테크닉은 다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연기의 기본과 본질은 다 같다(심지어 무용도 연기의 본질은 동일하다.)
장르를 넘나드는 존재이다. 호러, 액션, 등.
캐릭터와 캐릭터를 넘나드는 존재이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존재이다.
생각과 생각, 상상과 상상을 넘나드는 존재이다.
하나의 독백을 갖고 다른 버전으로 바꿀 때,
매체를 바꿔도되고…
그래도 일단은 캐릭터 성격바꾸기 연습해보자!
(형용사: 비겁한 사람, 차가운 사람, 등)
참고로, 텍스트에 묶이면 바꾸기 어렵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자.
엑서사이즈
- 말과 소리라는 것은 이미지가 말을 하게 하는 거다. 이미지가 달라지면 말과 소리가 달라진다. 읽었을 때 바로 이해가 되는 것들은 이 말과 이미지가 순식간에 결합되어서 이 결합되면 안떨어진다. 이미지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지게 만드는 훈련!
-배우는 자기말이 아니라 주어진 말로 연기를 한다. 자기 말을 해야할 때는 오직 캐릭터로서 그 말을 해야한다.
-모든 대사에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들 같이 있어야 한다. 말하지 않는 것들은 소리로 드러난다.
-쓰여진 말이 그 뜻이 아닐 때가 많다.
-이런 소리도 내고 저런 소리도 내고. 이런말도 하고 저런말도하고. 이게 배우다.
안톤 체홉의 <갈매기>
현대 대본은 이 작품을 기준으로 전,후로 갈라진다. 체홉으로 인해 “subtext”라는 것이 새로 생겼다. 서브텍스트는 바로 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서브텍스트는 많을 수록 좋은 작품이지만 배우가 연기하기에는 어렵다. 말하는것이 전부다인것은 서브텍스트가 잘 안되어있다는 의미이다. 캐릭터가 납작하고 단순하다.
배우의 소리! 소리가 나를 자유롭게 해라. 소리를 낼수록 자유로워진다
소리는 매우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소리라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진동이다. 이 진동은 퍼져 나간다. 진동을 듣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느낀다.
진동으로 인해서 말하는 사람의 말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진동으로 말을 듣는다.
좋은 소리를 가질수록 좋다. 듣기 싫은 소리 내면 본능적으로 듣기 싫어진다.
사람마다 고유한 소리가 있다. 누구나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좋은 소리란, 좋은소리를 내지 못하게 막는 것들이 제거된 소리다.
“하루에 한번씩, 내가 한번도 내지 않는 소리를 내라.”
“하루에 한번씩,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 몸짓을 해봐라.
그럼 그 순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낯선 것, 모르는 것, 이런걸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아는 것만 하면서 살면 나는 작아진다.
용기를 내려면 좀 발휘해야한다. 두렵지 않으면 용기가 아니다. 두려우니깐 용기를 발휘해야한다.
“혼란스럽지 않으면 제대로 배우는 게 아니다. 혼란스러워한다.”
“메소드는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다. 그렇다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자연스러운게 아니라 ‘자연적인 것’을 추구한다. 자연스럽다는 것은...익숙하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습관에 의해서 형성될 수 있다. 즉, 자연스럽다고 리얼한 것은 아니다.”
You are what you see.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는게 진짜 예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