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선택
여기에 쓰여지는 글들은 제시해주는 음악을 틀어 놓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온전히 글 속으로 더 빠져들 수 있어요.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음악을 알고 있다면, 눈을 감고 잠시 그 음악을 마음속으로 플레이하세요. 자. 이제 음악이 준비되었나요?
#준비할 음악: Bye Bye Bye by TBNY
음악을 플레이하세요.
난 이제 Bye Bye Bye Bye 멀리 떠날래
I'm so tired tired tired 눈을 감을래
난 이제 Bye Bye Bye Bye 멀리 떠날래
나를 나 줘 꿈에라도 잠을 잘 수 있게
...
# D-1 / AM 2:30 / 로스앤젤레스 그레이하운드 버스터미널
숨 가쁘게 달려왔다. LA 다운타운 으슥한 골목길을 밤 늦은 시각 지나간다는 것이 비 오는 날 혼자서 공동묘지를 지나가는 것과 비교가 될까. 둘 다 경험해 본 봐로는 확실히 전자가 더 임팩트 있다. 저 곳을 반드시 지나쳐야 된다. 국경도시로 가기 위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반대 쪽에 서있는 여러 무리의 흑인들 사이를 지나쳐야만 했다. 어둠 속 하얀 눈알만 번뜩이고 있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지나치는 거다. 심호흡 크게 한 번 하고, 하나, 둘, 셋 지금이다.
아직도 내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흑인을 보고 두려움에 떠는 것은 인종차별이다라고 생각하는 나지만 10분 전 내가 겪은 상황은 철저히 본능이 이성적 판단을 지배하고 벌어진 일이다. 환한 빛의 버스터미널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딱딱하다. 그렇지만 안도감이 든다.
멕시코와 미국의 경계선. 캘리포니아 국경도시 샌 이시드로로 가기 위해 나는 지금 이곳에 와있다. 약간의 대기 후에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나와 행선지가 같은 사람들. 국경을 넘는 사람들 중 동양인은 한 명도 없었다.
# D-1 / AM 5:10 / 미국 서부 국경도시 샌 이시드로 맥도날드
해쉬포테이토를 세 번째 주문하고 있다. 티후아나에 가면 물론 달러를 받는데, 거스름돈을 페소로 준다 해서 달러를 1불짜리로 최대한 바꿨다. 2불이 넘지 않는 해쉬포테이토 하나 주문하면서 20불 깨기에 전격 돌입했다. 3군데의 카운터에서 돌아가며 주문을 한다. 당연히 긴 줄을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내게 남은 여분의 20불 자리도 죽이고, 해가 뜨기까지 내게 주어진 여분의 시간도 죽여야 했다.
중간에 두세 차례 버스가 경유하고 나서 이곳 국경도시 샌 이시드로로 왔다.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각. 출국을 증명하는 증빙서류가 필요해서 버스표를 멕시코의 티후아나까지 예매를 해두었지만 티후아나 버스 터미널은 주요 중심지에서 떨어진 외곽에 있어 날이 밝는 데로 걸어서 국경을 넘기로 했다.
죽은 나의 20불은 기름끼 잔뜩 머금은 튀김으로 변해 내 앞에 놓여있다. 엄마가 생각났다. 9개월 전 인천공항에서 나를 떠나 보내며 눈물을 보인 연약한 엄마다. 나는 새벽에 LA 다운타운을 거리를 걸어 본 강인한 딸이다. 그 강인한 딸이 미국에서 추방당할 위기해 처한걸 연약한 엄마는 절대 알지 못할 거다.
# D-13 / PM 5:30 / 할로윈 데이
10월의 마지막 날, 길거리에 분장을 한 꼬마 아이들이 박스를 들고 사탕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갑작스런 레이오프를 당했다. 내게 월급을 주며 정리하고 나가라고 하네. 노티스도 없고 퇴근시간 30분 전에 최종 해고 사실을 알고 회사 컴퓨터에 있는 하드를 정리했다.
새롭게 꾸려진 우리 팀 프로젝트가 엎어지고 내 포지션이 애매해지는 상황에 나는 해고되었다. 나의 체류 목적인 인턴 비자는 프로그램 정상종료를 하게 되면 Grace Period기간이 30일 주어 져서 비자가 만료돼도 30일간 미국을 여행할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중간에 종료가 되면 48시간 안에 본국으로 강제 출국해야 되는 조항이 있다. 회사 측은 나를 다른 회사로 Transfer 시켜준다며 안심시겼다. 그러나 따뜻한 버팀목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매주 엄마와 스카이프를 할 때마다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권유 속에서도 꿋꿋이 버텼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다 바닥까지 내려가버렸다. 억울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열 받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었다가 허탈해지기까지. 전 날 비가 온 후 유난히도 맑은 하늘, 낮게 깔린 구름이 아름다운 할로윈 데이에 일어난 일.
아. 어떻게 흘러가는 건가.
# D-1 / AM 6:15 / 미국과 멕시코 국경선
눈앞에 멕시코가 보인다. 이른 아침 사람들은 덤덤히 도 이곳을 지나간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멕시코인들은 매일 아침 이곳 국경선을 넘어 미국으로 출근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 눈을 붙인다.
나도 그들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던 걸까. 예정된 1년 6개월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9개월 만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아무튼 지금은 불법체류가 되기 전에 정상적으로 출국을 증명해야 했다. 나는 멕시코를 선택했고, 그곳에 하루 머문 뒤, 다시 정상적인 루트로 미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신분에서 여행자의 신분으로 말이다.
눈 앞에 보인 국경을 구분 짓는 철문을 보고 마음에 조금 동요가 일었는데, 그곳을 지나치는 많은 사람 들 중 유일하게 나만 그런 거 같다.
잘 있어 미국.
# D-DAY / AM 8:35 / 티후아나
미국에 있는 미국 국적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육로로 국경을 넘었다가 다시 들어오는 신분 세탁을 한다. 그래서 육로로 연결된 국경은 심사가 까다롭다고 정평이 나있다. 자칫 입국이 거절되면 평생 꼬리표로 남아 영구적으로 미국에 오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더욱 나는 긴장을 했다. 다시는 미국 땅을 밟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했다.
쉽게 미국을 벗어났다. 멕시코 출입국 관리소에 들러 도장 좀 찍어달라고 몇 분을 실랑이를 했다. 융통성 없는 그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국경도시 멕시코의 티후아나는 위험한 도시로 알려져있다. 그렇지만 내가 실제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그 도시는 너무나도 다르다.
쉽게 미국을 통과했다.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다시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LA로 돌아오는 길, 아름다운 석양을 감상하며 탈없이 미국 재입국 성공을 감사히 여겼다. 새로운 신분, 여행자로서 다시 돌아온 캘리포니아.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90일. 좀 더 있으려면 신분변경을 하거나 이렇게 장담할 수 없는 국경을 넘나드는 짓을 반복해야 된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변호사와 수차례 통화를 했는데 이렇게 무비자로 체류하면 다시 무비자 체류를 위해서는 보통 한국으로 출국했다가 최소 3개월 후에 정상루트로 들어오기를 권장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일단 큰 산을 하나 넘었으니 잠시 쉬었다 가자.
이 일은 3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은 티후아나로 입국하는 데에도 입국심사를 한다고 하네요.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길이었지만 그곳에 하루 머물며 맛보았던 1불짜리 타코가 그립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글을 적는 저와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보게 될 분들과의 소통과 공감의 연결고리가 되길 희망합니다. 자. 이제 플레이를 멈추세요. 저의 사운드 오브 브런치 6화는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