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세다리 안단테

아직 끝나지 않은 길

by 아살리아
여기에 쓰여지는 글들은 제시해주는 음악을 틀어 놓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온전히 글 속으로 더 빠져들 수 있어요.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음악을 알고 있다면, 눈을 감고 잠시 그 음악을 마음속으로 플레이하세요. 자. 이제 음악이 준비되었나요?





#사운드 오브 브런치 제 5화 - 간세다리 안단테

#준비할 음악: 20 Century Humanoid by Minos in Nuol



음악을 플레이하세요.



시간의 흐름 속에 많은 단어를 흘려왔지

지각이란 생각에 쉴 틈 따윈 없다고


발걸음을 옮겨 가지만 나의 청춘은

20세기에 멈춰있지


...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는 길 위를 8시간째 걷고 있다. 태양이 구름에 가리고 달빛이 고개를 들 때쯤 가시거리가 점점 좁혀져 가는 가운데 저 멀리 표선당케포구의 불빛을 보았다. 다와 간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스스로 위로하며 열심히 달려가다 표선의 백사장을 만났다. 어두워서 자세까지 낮춰가며 안내판을 읽어보니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는 위험하니 백사장으로 지나가지 말고 도로로 올라가서 건너 가라는 문구였다.

안내판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위험할뻔했구나 싶어서 도로 쪽을 향해 발을 돌렸는데 거기서부터 길을 잃었다. 아니 아예 길이 안보였다.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불빛 하나 없고, 앞으로 전진할수록 깊은 수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긴장감 넘치는 기분이란. 나침반은 없었지만, 손전등은 없었지만 내 감을 믿었다. 표선포구는 앞쪽에 있고 큰 도로를 만나려면 오른쪽이니 나는 45도로 계속 전진했다. 그러면 수학적 개념에 따라 포구와 가까워지면서 큰 도로를 만날 수 있으리라 단순히 생각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건 어둠뿐이니 행여 내가 가는 지금 여기가 길이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눈에 보이는 건 어둠뿐이고 그 무슨 빌어먹을 가당 치도 않는 용기가 솟구쳤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나무들과 숲 풀 속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철창을 만났다.

뒤를 돌아서 되돌아 갈까 싶었는데 그러면 진짜 미아가 될 것 같았다. 그 순간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악몽처럼 되풀이되는 꿈이 생각났다. 내 시야는 아주 낮고 내 의지와는 다르게 걸음의 보폭이 짧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출구를 찾듯이 헤맨다. 그러다가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눈 앞에 나타난다. 나는 당황한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 길을 헤매지만 그 거대한 벽은 다시 나타나 날 가로막는다.


사실 이것은 내가 5살 때 겪었던 실제 내게 일어난 일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같은 동네에 사는 언니가 등굣길에 나를 데려갔다가,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으라고 해놓고 무심하게 교실로 들어가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내 기억으로는 그 언니를 기다리다 지쳐 나홀로 집으로 귀환하는 멀고도 험한 여정이었다. 그 길에서 벽을 만났고, 중간기억은 점프 뛰고, 석촌호수를 만났는데 그 곳에서 어떤 낯선 아저씨가 나를 데려가려고 시도하는 것을 내가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 현실은 해피앤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꿈속에서는 그 미로 속을 단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하고선 꿈에서 깨어난다.


꿈속에서 나타나는 그 벽과 이 숲 풀 속에서 나타난 철창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어렸을 적 모험가가 되려면 담을 잘 넘어야 된다는 생각에 엄마의 하이힐을 훔쳐 신고 남에 집 담벼락을 넘나 들었다. 그때의 그 희열을 잊은 채 어른이 되었다.


남들처럼 중학생 사춘기 시절을 보냈고, 수업도 빼먹고 1세대 아이돌에 열광했고, 같이 어울렸던 무리 중에 2명이 가출을 하는 바람에 엄마가 학교로 호출되었고, 엄마의 눈물을 보았고, 정신 차렸고, 1차 수시에 합격했고, 난생 처음 교장실로 불려 가 축하도 받고, 수능도 안 보고 쉽게 대학을 갔고,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아무것도 안 한 거 같은데 어느덧 시간은 흘러 2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4년간 일했던 첫 직장에서 사표를 던지고 나오기까지, 너무 돌고 돌아 겨우 출구를 찾았다. 꿈속에서 악몽처럼 등장하는 그 뫼비우스 띠 같은 미로 속을 살아 온 기분이 들었다.


보수적인 상하구조가 확고했던 그런 회사였다. 야근이 잦았고, 지각에 예민했고, 조용했지만 언성이 높았고, 눈치를 봐야 했고, 짜증과 불만이 오고 갔다. 퇴사하는 그날까지 업무가 쌓여있었다. 마지막 근무를치고 걸었던 역삼동 밤거리, 그 길 위에서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매일 같이 오고 갔던 거리 위를 마지막으로 걷는 기분이 후련하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서러웠다.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올레길 창시자 서명숙님의 에세이 집이다. 그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돌고 와 제주에 올레길을 만들었다. 그녀의 책이 회사 여자화장실 마지막 변기가 있던 칸에 놓여 있었다. 누군가 놓고 간 그 책을 나는 어느 나른한 오후에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여기를 박차고 나가는 날, 그 길 위에 서겠노라고.


1년 뒤 나는 그녀가 만든 그 길 위에 섰다.







철창을 넘은 날, 나는 하루 만에 올레길 30km 걸었다. 회사를 퇴사한 후, 처음으로 제주의 올레길을 만난 이후로 나는 매년 제주를 간다. 5년째 이어지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만든 그녀는 간세다리가 되라고 한다. 올레길은 느리고 천천히 걸을수록 좋다. 나도 그 철창을 넘었던 그 첫 여행 이후로는 무리하게 코스를 잡지 않는다. 그간 이 곳에서 좋지 않은 사건도 있었고, 어느 구간은 올레꾼들로 인해 오염되어 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점점 퇴색해져 가는 기분 마저 든다. 아무도 모를 나만의 길을 찾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결국 길이란 건 발을 내딛는 순간 만나게 되니까.
간세다리 안단테.





마지막으로 봤던 제주의 하늘











우리 한번 쯤은 간세다리 안단테로 걸어가 보는 건 어떨까요. 음악을 들으며 글을 적는 저와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보게 될 분들과의 소통과 공감의 연결고리가 되길 희망합니다. 자. 이제 플레이를 멈추세요. 저의 사운드 오브 브런치 5화는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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