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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페페 Feb 22. 2024

글쓰기와 프로토타입

 얼마 전 “이번 겨울에는 눈이 유독 많이 오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루 동안 두 번,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서, “오… 정말요. 그래요.”라고 대답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도 알고 있거나 원래 생각하고 있던 것인데, 입 밖으로 내뱉어진 말로 듣거나 글자로 쓰인 문장으로 마주해야 비로소 실감 나는 사실들이 있다. 이번 겨울에 눈이 많이 왔다는 사실이 그렇듯이. 마음이나 생각도 마찬가지다. 정리된 글로써 기록하다 보면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메모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생겼을 때 얼른 아이폰 메모장에 짧은 메모를 해두거나 무지 노트에 기록해 두곤 하는데, 그렇게 남겨둔 문장이나 단어들을 발전시켜서 노랫말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로 사용하기도 하고 글감으로 쓰기도 한다. 산발적으로 불쑥불쑥 찾아오는 짧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기 전에 기록하고 서로 묶어나가다 보면 그것들이 비로소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그것들이 내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렇게 습관처럼 해왔던 기록 행위가 대단한 창작물로 거듭난 적은 없었기에 나의 이 글쓰기가 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하는 의문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오늘 오후 <작가들의 글쓰기 워크북>이라는 책을 읽었다. 작년 11월에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구입한 책이었는데 1월 말이 되어서야 읽게 됐다. 여덟 명의 작가들의 글쓰기 경험이 담긴 책 한 권과 글쓰기 연습을 위한 워크북이 세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읽고 나니 이제야 읽은 게 아쉬울 정도로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들이 글을 쓰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과정과 고민은 현재의 내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내가 갖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일기의 형태로든, 혹은 조금 더 정제된 형태의 글로든 ‘쓰는 행위’ 자체를 계속해 왔던 나의 습관들이 늘 창작에 대한 욕구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계속해 오던 글쓰기는 아직 완성되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프로토타입, 혹은 원형에 가까웠다. 그간 나의 글쓰기가 더 본격적인 단계로 진입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내가 그것을 진득하게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글은 충분히 좋지가 않아.’ 혹은 ‘내 글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을 거야.’ 같은 생각을 거치고 난 글은 충분히 익어버리기도 전에 가차 없이 삭제되거나 컴퓨터 폴더 깊숙한 곳에 처박혀 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 스스로에 대한 의문을 품거나 처음부터 일을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늘 그렇게 의심을 품은 채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그 일 자체에 대한 동력을 앗아가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책을 쭉 읽다가 김해리 작가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잘 쓰려고 하기보다 ‘일단’ 쓸 것.”  


 그 문장을 읽으며 내 문제가 역시 이거였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나와 내 글이 부끄러웠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늘 걱정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내가 이 행위를 계속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유의미하게 계속해 나가도 될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글이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이상하게도 창작이라는 것은 내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비밀스러운 감정과 동시에, 깊은 바닥에 떨어진 듯한 고통을 함께 준다. 글쓰기도, 음악도, 그림도 그렇다. 잘하고 싶은 만큼 나를 싫어하게 만드는 일. 하지만 그래서 늘 매력적인 일.


글, 그림 - 주페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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