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15
나에게 제일 잘 맞는 다이어리를 찾은 뒤로 n년째 같은 다이어리만 사용하고 있다. 같은 브랜드의 다이어리를 매년 표지 색깔만 다른 것을 구입해 사용하는 것이다. 먼쓸리 페이지와 위클리 페이지를 지나 격자무늬와 줄무늬 속지가 차례대로 나오는 심플한 다이어리. 군더더기 없는 구성이 매일의 할 일과 그 달의 특별한 사건을 정리하기에 좋다. 하루와 일주일, 그리고 한 달의 일상이 모두 계획과 기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에게 다이어리는 어딜가나 들고 다니는 필수품이다. 그런 중요한 물건을 일년에 한 번 새로 사야 한다는 것은 꽤나 귀찮은 일일 수 있으나 답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부담을 덜어낸 기분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자신만의 루틴 때문에 한가지 아이템만을 고집하는 인물이 등장하곤 하는데, 나의 다이어리 습관도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나의 수집상자에는 지난 수년간의 기록이 열을 맞춰 남아 있다.
시중에 나온 대부분의 다이어리에는 나처럼 새해가 시작되기 전부터 빨리 새 다이어리를 펼치고 싶은 성미 급한 사람을 위해 전년도 12월부터 쓸 수 있는 페이지가 마련되어 있다. 빳빳하고 깨끗한 새 다이어리를 볼 때마다 그 여분의 페이지를 보며 어서 새 다이어리를 개시하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난다. 이런 저런 계획들을 새 다이어리에 적는다고 해서 그것이 더 잘 이루어지는 게 아닌데도 새 다짐들은 굳이 새 종이에 적고 싶다. 마치 그 행위가 나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새 출발은 새 다이어리로!
‘올해는 이미 다 가버렸군. 내년에는 조금 더 나은 해를 만들자. 조금 더 나은 내가 되는 거야.’
하지만 그 다짐은 결국, 모든 것을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언젠가의 나중’으로 미루고 싶은 마음에 불과한 것 아니었나. 지난 해의 다이어리를 펼쳐 보면 쓰다 만 12월의 페이지가 빈칸으로 덩그러니 남아 있다.
물론 올해도 다가올 해의 다이어리를 미리 구입해 두었다. 다만 이번엔 색깔까지 같은 것으로 결정했다. 너무 튀지도 흔하지도 않은 짙은 초록색이 조금의 어긋남 없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미리 사둔 새 다이어리의 포장을 뜯어 낡은 다이어리 옆에 나란히 두었다. 그러나 모양도, 색깔도 같은 두 개의 다이어리를 바라보며 나는 조급히 새 다이어리로 옮겨갈 필요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2024와 2025라는 연도의 구분이 새상품에 붙여진 라벨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바뀐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마법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해서 같은 다이어리에 그날의 할 일들을 계획하고, 기록하고, 하루를 채워 나가는 일이 계속되는 것처럼, 그저 오늘이 지나 내일이 오고, 내일이 지나 모레가 오는 것이라는 것을. 삶은 언제나 연속적이었다는 것을. 나의 중심을 이루는 많은 것들을 흘려 보내지 않고 단단하게 붙들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처음으로 조금 다른 다짐을 할 수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다이어리를 끝까지 써내는 사람이 되어 보자고. 새로운 다짐들을 내년의 나에게로 미루는 사람이 되지 말자고. 그렇기에 남은 12월의 하루 하루를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히 써 내려가 보자고. 그 이후 펼치게 될 새 다이어리 속 하루들을 더 큰 기대로 맞이해 주자고.
글, 그림 주페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