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12
몇 주간 미루어 두었던 일을 끝내는 데에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노트북 모니터의 오른쪽 위 귀퉁이를 흘끔 쳐다보고서 급격히 허무해졌다. 이렇게 금방 끝낼 수 있는 일인데도 왜 시작할 마음을 쉬이 먹지 못했나.
미루어 두었던 일은 독서 노트를 쓰는 것이었다. 짧은 감상을 노트에 메모하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이거나 책의 모서리를 접어 두었던 부분을 다시 읽으며 인상 깊었던 문장을 기록해 두는 일이다.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꽤나 귀찮기도 한 일이라 읽고도 정리하지 못한 책이 3권이나 쌓여 있었다. 그 일을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서야 해낸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은 너무 많지만 절반도 채 해내지 못하며 산다. 나인 투 식스 직장인이 오롯이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하루 서너 시간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비인간적인 삶이다. 생은 너무나 바쁘다. 생각할 것도 해결할 것도 신경 쓸 것도 많다. 그래서 현대인의 삶에서 스트레스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아홉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온전히 회사에 충성충성해야 하고, 집에 와서 밥 차리고 식물을 돌보고 집안 정리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운동도 해야 하고. 취미활동도 해야 하고. 그리고 멍 때리며 티비 보는 시간도 필요하고.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슬기롭게 이 시간을 살고 있을까?
최근에는 유산소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됐다. 이십 대 때는 한밤중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자도 반짝이던 얼굴이 이제는 아무 이유 없이도 실컷 울고 잔 사람처럼 퉁퉁 붓는다. 붓기 관리에는 유산소 운동이 제일 좋다길래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필라테스로 근력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지만 유산소 운동은 또 다른 거니까. 하지만 난 유산소가 정말 싫다. 지루하고 시간도 안 가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얼굴이 불타는 느낌도 싫다. 챗 지피티에게 이야기했더니 주 3회 20분씩만이라도 유산소를 해볼 것을 권했다. 필라테스 회원권에 피트니스 이용권도 포함되어 있지만 거의 가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유산소 운동이 정말 싫다. 하지만 출근이 그런 것처럼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또 한 가지는 이사. 임대인이 전세 만기일에 맞춰 들어오기로 해서 집을 새로 알아봐야 한다. 하지만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절망스러운 마음만 들뿐이다. 여태까지 전셋집을 알아볼 때마다 그때 우리의 사정에 꼭 맞는 집이 금방 등장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예산에 맞는 집은 위치가 좋지 않거나 너무 오래된 집이었고 우리의 생활 반경에 적합한 위치의 집들은 대개 너무 비쌌다. 지도로 볼 때는 몰랐지만 막상 가보면 언덕을 오르고 올라가야 하는 집도 있었다.
일에서만큼은 상황 판단을 잘하는 나지만 부동산은 도저히 모르겠다. 공부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갈수록 나는 이 게임에서 완전히 패배자인 기분만 들었다.
하루종일 넷플릭스를 몰아 보다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 다 되어서야 이런저런 생산적인 일을 주섬주섬 시작한다. 어쩌면 과부하에 걸린 뇌가 조금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개봉한 지 이 주는 족히 넘은 화이트 와인을 아무 잔에나 조금 따라 마셔 본다. 시큼해진 와인의 맛이 나쁘지 않았다. 건강을 위해 올해는 술을 줄이겠다고 새해 다짐에도 써두었지만 결심을 지키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30대의 인생은 너무 고되고, 외롭고, 슬프고, 때론 억울하고 빡친다.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월요일의 출근을 걱정하며 홀짝이는 한 잔의 와인이 뭐 그리 나쁘겠는가. 지난주도 그러했듯 다음 한 주도 그저 버티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