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구상한 연구 주제에 대해서 스스로 실험을 계속 진행한 결과, 나의 주장을 뒷받침할 정도의 초기 실험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연구의 깊이는 아직 얕아 보였는데, 그래도 주제의 참신성 면에서는 지난 리젝 논문에 비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보다는 실험적인 결과를 위주로 얻은 것이라서, 앞으로 연구의 깊이를 어떻게 더 보강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우선 지도교수를 만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준비한 실험 결과와 요약 슬라이드를 다 살펴보기도 전에, 그는 이미 몇 마디를 나눠보며 내 연구의 핵심을 이해한 듯했다.
"음.. 이게 다라면 논문 작성은 어려워 보여요."
"그렇지만 ~~한 면에서 지난 리젝 논문보다는 참신성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음.. 그럴 수 있죠. 겉으로 보기에 지난 논문보다 주제의 참신성이 조금 있긴 해요. 그렇지만 이 상태로 완성을 한다고 해도, 결국 지난 번과 비슷한 수준의 리뷰를 받을 거 같아 보여요. 깊이 있는 통찰이나 논문에서 해결한 문제의 깊이가 그리 깊어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지 않나요?"
"..."
"지난 논문도 그렇고, 무언가 실험을 해서 결과를 적어냈으니 리뷰어를 잘 만나서 아주 운이 좋다면 붙을 수도 있죠. 그렇지만 학생도 이제 2년 간 논문을 많이 읽었을 테니, 최우수 학회에 실리고 그중에서도 좋은 연구로 인정받는 논문에 대한 기준을 스스로 얻었지 않나요? 최우수 학회에 붙더라도 가끔 운이 좋아서 붙을 만한 연구를 하면 안 되고, 그중에서도 평균 이상의 수준이 되는 연구를 해야죠."
"네. 그런 면에서는 연구의 깊이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지도교수는 취업 준비를 우선할 것을 권했다.
"학생은 왜 논문을 쓰고 싶어 하나요? 이미 지난 논문 리젝만으로도 석사 졸업 기준은 만족했을 텐데요."
"스스로 아쉬움이 좀 남았습니다. 졸업 전에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걸 더 보완하여 최우수 학회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면 앞으로 졸업 전까지 이것만 붙잡고 해도 쉽지는 않을 거에요.. 그리고 어차피 지금 논문을 써서 붙는다고 해도, 시기상 일자리를 구할 때에 어필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내 조언은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걸 우선으로 하는 게 더 낫지 않냐는 거에요."
"네 알겠습니다. 취업 준비를 잘 해서, 원하는 기업에 갈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주제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지도교수의 조언은 합리적인 면이 있었다. 논문을 작성해서 제출하더라도 12월은 되어야 제출을 할 텐데, 그러면 하반기 열리는 채용 전형에서는 이 연구 내용을 어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단지 리젝에 대한 아쉬움만으로 조금 더 붙잡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고 취업을 미룰 생각도 없었다. 지도교수의 조언을 들으니 오히려 학회 논문에 대한 미련을 비로소 털어버릴 합리적인 핑계가 생긴 것 같았다. 10월부터는 여러 회사들의 채용 전형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이제 여기에 조금 더 힘을 실어 준비하기로 했다.
H사는 최근 높은 금전적 보상으로 화제를 모은 기업이다. 글로벌 무대에서 시장 가치가 높아지며, 임직원들에게 파격적인 금전적인 보상을 보너스로 제공한다는 것이 기사,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많이 퍼진 것이다. 취업 준비를 한다고 하면 다들 H사에 붙기만 하면 부자가 되는 거 아니냐며 말을 한 마디씩 건네곤 했다. 직무 흥미나 적합도,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 급여 등을 고려했을 때 H사는 분명 아주 좋은 회사였고, 내가 후보군으로 생각하는 회사들 중에서는 집에서 거리가 가장 멀다는 것 정도가 유일한 단점이었다.
H사는 S사와 서류 전형이 유사했다. 학위, 성적, 경력 사항 등 정량적인 정보들을 입력하고, 에세이 형태의 글을 작성해야 했다. 에세이 문항은 조금 달랐지만, 학업 내용, 비교과 활동 등을 하나의 유기적인 스토리로 엮어서 나 자신이 드러나도록 글을 작성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했다. 약 2주 정도 뒤에 서류 결과가 나왔고, 서류 전형에 합격하였다.
H사의 2차 전형은 인적성 시험과 비대면 녹화 면접이었다. 신입 채용 절차의 주요 전형 중 하나가 인적성 시험인 기업이 많다고 하는데, 내 경우는 웬만하면 직무 특성상 코딩 테스트로 대체가 되기 때문에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언어 영역, 수리 영역, 논리 영역 등 몇 개의 영역에 걸쳐 객관식 문제 풀이를 하는 시험인데, 수능과 비교하자면 개별 문항의 난이도는 더 낮지만, 문제 수 대비 제한 시간을 빠듯하게 둔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코딩 테스트는 그래도 실제 업무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역량을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인적성 시험은 사실 왜 보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전형이었다. 나는 채용 지원자의 입장이지만, 기업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워낙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채용 절차에 응시를 하다 보니, 제한된 시간 안에 객관적인 평가 구실을 만들어 지원자들을 평가하기에 용이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런 듯했다. 따지고 보면 언어 이해, 자료 해석, 수리/논리적 사고력 등 모두 직무 역량과 연관 지으려면 얼마든 연관 지을 수 있는 것들이기에, 여러 모로 인적성 시험을 대체할 만한 더 효율적이면서 객관적인 신입 채용 전형은 아직 발명된 것이 없는 듯했다.
나는 친구가 보내준 기출 문제를 몇 개 풀이하며 문제 풀이 감각을 익혔다. 그리고 인적성 시험을 응시했고, 전반적으로 기출 문제와 유형이 크게 다르지 않아 예상한 문제 풀이 전략을 활용하여 적절히 풀이할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장점이 될 지는 모르겠으나, "상대평가를 위한 객관성 확보에 초점이 맞춰진, 쓸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이게 무슨 역량을 평가하는지는 다소 모호한 시험"에 나는 비교적 강한 편이었다. 공학을 전공하는 사람 치고 인문학, 사회학 등에도 두루 관심을 가지는 게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시험을 많이 치면서 시험 전략을 나름대로 터득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시험은 내 삶에서 잊을 만하면 종종 등장해왔고, 나는 그때마다 크게 아쉽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대학원을 진학하고 앞으로는 이런 류의 시험을 마주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시험을 위해 시간을 재고 문제를 풀며 공부하는 것은 흥미롭지는 않은 일이다. 시험이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는 웬만하면 이런 류의 시험을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대면 녹화 면접은 주어진 문항에 답을 하는 것을 영상으로 녹화해 제출하는 것이다. 자기소개의 범주에 속하는 문항, 직무와 관련된 문항들이 출제되었다. 직무와 관련된 문항은 아주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했던 내용이라, 대략 아는 지식들을 조합하여 답변하였는데, 면접 직후 찾아보니 각각의 정보들은 크게 이상할 게 없는 내용이었는데, 답변의 논리가 썩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 같지는 않았다. 카메라를 응시하며 답변하고 있는 녹화 영상 속 나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으로 약 15분 간의 녹화 면접이 마무리되었고, H사의 2차 전형 역시 마무리되었다.
S사: 총 3차 전형 중 2차 코딩 테스트 응시 완료
H사: 총 3차 전형 중 2차 인적성 및 비대면 면접 응시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