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아직도 방황 그 이름 30대

성장의 딜레마 극복하기

by 깔끔후니

ㅣ나도 운이 좋았다ㅣ


# 2016년 10월

정릉 역에 위치한 [중앙하이츠 아파트] 앞 부동산에 들렸다. 아버지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머쓱한 웃음을 보임과 동시에 약간 으쓱거리면서 말씀하신다 "아들이 하도 집 사달라고 해서 집 보러 왔어요" 부동산 중개업자는 콧등에 걸친 안경테를 쓰윽 올리며 검지 손가락에 두어 번 침을 꾹 발라 장부를 넘겼다. 그동안 얼마나 넘겼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종이가 쭈글거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빨간 줄이 쳐진 곳은 빼고 손가락으로 장부 한 곳을 주욱 긋더니 이내 핸드폰을 들었다.

"사장님 집 보러 가도 돼요?"

아버지와 어머니 중개업자 그리고 나는 중앙하이츠 끝동에 있는 1102호에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오늘만 벌써 6번째 집이다. 이 집 역시 집주인이 전세를 주고 있어서 지저분하게 쌓인 짐이 방마다 가득 찼다.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걸 눈치챘는지 25평 가격은 3억 9천5백까지 맞춰 준다고 했다.

"생각 좀 해볼게요" 생각을 한다는 건 계약할 마음이 없다는 말을 기분 좋게 돌려서 한 거다. 역시나 오늘도 공쳤다. 아버지가 1억을 보태주기로 했고, 나머지는 내가 가진 돈과 주담대(주택담보대출)를 이용하면 매매할 수 있었지만, 당장에 집이 급한 건 아니라서 집값이 떨어질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 2021년 7월

회사에서 준 사택에 산지 벌써 5년이 되어간다. 사택이라 원리금은 내지 않지만 그렇다고 많은 돈을 저축하지도 않았다. 옅고 얕은 지식으로 무분별하게 한 그동안의 투자는 고스란히 마이너스로 남겨졌다. 과소비를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결혼 후 정산을 해보니 약 1억 원의 손실을 보았다. 투자와 사고의 난폭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때 그 집은 10억이 넘어 있었다.


집을 사지 못한 건 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였고, 부의 격차는 더 커져가기만 했다. 우리 부부 모두 대기업에 다니지만 월급이 오르는 속도는 아파트값의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세상 물정 모르게 저축만 잘하고 있으면 집값이 반드시 내릴 테니 그때 주우라고 하셨다.


그때 알게 되었다.

'자식에게 집 한 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집값이 내린다고 말했다는 것을....'

그때부터 모든 게 잘 안 풀렸다. 집은 그렇다 쳐도 빚은 늘어갔다. 실컷 써보지도 못한 돈이 빚이 되어 돌아오니 출근조차 하기 싫었다. 인생의 가장 활동적이고 황금기인 돌아오지 않는 30대를 더 이상 잡을 수 없기에 더 초초했다.

투자의 실패. 자신감의 추락. 두 번의 진급 누락으로 인한 회사에서의 영향력 결여가 내게 우울증을 선물했고,

인생을 살면서 처음으로 인생의 끝을 생각해본 적도 솔직히 몇 번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꼭 그래야만 했다.


좋은 회사에 다니기 때문에 싸인 몇 번 안 하고도 은행 대출이 쉬었고, 회사에서 공급해주는 사택으로 추가적으로 나갈 돈이 세이브되었고, 회사일도 촘촘히 구성되어 있기에 업무과중도 없었다. 또한 회사 직원들의 맨파워 역시 훌륭하기에 인성면에서 부딪히거나 사람 때문에 힘든 일도 없었다.

결국,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운이 좋기에 그나마 여기까지 온 거였다. 이만큼이라도 해 놓은 게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하고 이런 회사에서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ㅣ더 이상 잘하려고 힘을 쏟지 않기ㅣ


무엇보다 급했기 때문에 더 잘하고 싶었다. 성공해도 방탕하며 살지 않을 거라 다짐했기에 행복을 앗아간 신에게 하소연한 적도 있었다.


서른 중반이 넘으면서 나의 인생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남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시기가 점점 많아진다. 아내를 위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분리수거와 잔뜩 쌓인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정리하는 일은 나의 개인 시간을 잡아먹었고 ,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서랍장을 씻어 말리고 출산 디데이 달력을 넘기는 일도 내 몫이었다

그만큼 급했고. 뭔가를 이뤄야만 했고, 누구보다 절실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이룬 게 하나 없다고 생각해보니 난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고생과 노력을 했을까? 좌절하고 힘들었다


차라리 이 정도의 수준으로 산다면 고등학교도 가고 싶었던 남녀공학 실업계로 가고, 미래를 위해 군대를 사관학교에 가거나 장교생활도 안 했을 거고 전역을 했을 때도 일을 바로 시작하지도 않고 한 달간 해외여행을 다녔을 거다. 또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모든 차의 창문을 열어놓고, 차 안에서 노래를 크게 부르며 학교를 오가지도 않았으리라...



ㅣ난 성과위주였다ㅣ


성과가 없으면 무의미하다 생각했고, 삶의 순간 속에서 훈장을 하나씩 달고 가야 그게 인생을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 있는 친구와의 술 약속도 거절하고 친구의 고민을 듣는 시간이 낭비된다고 생각하여 그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진심을 온전히 받아주지 못한 친구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 30대 중반이 되어도 모른 채 계속 열심히만 살았고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ㅣ수수께끼의 본질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ㅣ


수수께끼는 재미있다.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은 문제를 푸는 사람이 맞추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짤 때 그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고,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은 정답을 찾을 때까지 그 쫄깃함이 재미있다

그렇다. 수수께끼의 본질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문제를 푸는 과정이 바로 수수께끼의 본질이다.

막상 문제의 해답을 듣고 나면 "아 그거였어?"라며 또 다른 수수께끼를 찾는다.

나의 삶도 그랬다.

1. 자전거로 서울에서 부산을 갈 때도 이화령 휴게소를 넘고 충주에서 물폭탄 비를 맞을 때가 더 좋았다

2. 유튜브를 할 때도 구독자 1000명 달성했을 때보다 오후 반차를 쓰고 커피숍에서 편집할 때가 더 좋았다

3. 대기업에 취업한 것보다 면접을 보며 내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면접관을 바라볼 때가 더 좋았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수수께끼와 같다. 그리고 그 인생은 해답을 찾는 것보다 풀어내는 과정을 더 기억한다. 눈물. 콧물 쥐어짜고, 치아 8개 이상 보이며 웃을 때가 더 좋은 인생이다


그래 이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