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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Mar 30. 2024

봄의 위로

죽음을 앞둔 어느 노철학자의 말


나는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다.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다.


Dying Speech of an Old Philosopher

I strove with none;
for none was worth my strife;
Nature I loved, and next to Nature, Art;
I warmed both hands before the fire of life;
It sinks, and I am ready to depart.


-월터 새비지 랜더(Walter Savage Landor)


"불현듯 앞으로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몇십 번 몇백 번 반복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는 비가 잦다. 온전한 햇빛을 보는 날이 많지 않은데 오늘은 햇빛이 비쳐 좋아라 했더니 아침부터 강풍이 불어 바람 소리에 놀랄 지경이다. 그래도 반가운 햇빛이 이런저런 속상함에 우울해진 나를  밖으로 불렀다. 내 잘못이 아닌 일에 속상하지 말라고 쓸데없이 속상하면 나만 손해라고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조용히 책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시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져 간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시간을 철석같이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 확실한 것일까? 돌아가신 아버지가 막내가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잠시 구경 오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주민등록등본에는 집이지만 이곳에 전에 살던 누군가가 지상의 봄날 벚꽃 구경을 하다 어떻게 바뀌었나 궁금해서 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경계는 아주 분명하면서도 모호하다.


태어나는 순간 생로병사가, 정확히는 로병사 기다린다. 서서히 아주 느리게 늙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순간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병이 찾아온다. 책에서 숱하게 보았던 주변인들의 죽음도...


그럼에도 나의 죽음에 대해선 철저히 부정한다. 당장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착각 속에 쓸데없는 것은 더 절약하고 필요 없는 것은 더 사들인다. 알면서도 피한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여기며 생에 대한 집착이 겉으로 드러날까 꽁꽁 숨긴다.


내게는 벚꽃이 피어야 봄이다. 2024년에도 어김없이 피어나는 고마운 벚꽃을 보며 절정을 이룰 4월을 기다린다. 섞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늙음을 준비하고자 노력하는데 여전히   주변인들의 협조는 없다. 싸울만한 가치가 없는 상대와는 싸워봤자임을 알면서도 그들이 내뱉는 허튼소리를 한 귀로 내보내기는 여전히 힘들다. 가족 한 사람의 희생을 고맙다기보다 당연히 여기며 본인의 권리만 외치고 의무는 없다고 여기는 것에 지칠 때 벚꽃이 위로를 해준다.


자연에 위로받았고 자연 다음은 시가 기다린다. 월터의 시가 내게 그랬다. 싸울 가치가 없는 사람과 싸우지 말라고. 그래서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차분히 할 것이다. 고치지 않을 것은 분명하겠지만 내게 당당하게 요구하지 말라고 경고는 해야겠다.


햇빛과 벚꽃과 시가 내 고민을 함께 풀어주었다. 고맙다고 커피 한 잔 밥 한 끼 안 사줘도 되지만 이 고마움을 글로 표현은 해야겠다. 사람도 필요하지만 사람만의 위로가 충분하지 않을 때 나를 위로해주는 하늘과 바람과 꽃과 시와 음악과 시간과 계절 어르신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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