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천히바람 Apr 19. 2024

치매일기

치매 - 지혜와 도움을 구합니다.

극한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 신체가 충격을 경험하는 방식이 그러하듯이 (전투 중에 군인이 자기 팔 하나가 잘린 것도 모르고 수 마일을 달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심한 심리적 상처를 겪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한 메커니즘이 가동되어 한 번에 조금씩,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머릿속에 들어온다. 엄청난 힘을 발휘해 차단하거나 왜곡하는 방어기제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 수 클리볼드




2024년 4월 11일 목요일.


나는 날짜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은 기억해야 하고 앞으로 일들은 우리 가족을 위해 기록해야 할 것 같다. 그제 찍은 남편의 MRI와 보건소의 기초의뢰서를 들고 오늘 제주한국병원신경과에 갔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작년부터 남편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거나 질문에 동문서답을 자주 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정확한 단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원래 말수가 그리 많지 않아 그러려니 했다. 나이가 들며 총기가 떨어진다고 놀렸다.


지난주 아들이 휴가차 집에 왔다 아버지가 이상하다며  이것저것 물었다. 애매하게 대답하는 아버지에게 정확한 단어로 말해보라며 점심메뉴와 외식한 식당이름을 물었다. 남편은 외식을 하러 간 것은 알았으나  나온 음식은  대답하지 못했다. 남편은 아들과 병원에 가기로 약속했고 오늘 병원에 다녀왔다.


의사는 상세불명의 치매라고 했다. 더 큰 병원에 가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뇌 사진에 좌뇌의 전두엽과 측두엽이 위축되었고 치매검사에서 기억력과 언어, 수행력에서 심각한 결과가 나왔다. 남편이 검사하는 동안 새어 나오는 울음을 참다가 스스로 씩씩해야 한다고 격려하며 불안을 잠재우려고 했다.


 내 삶의 가장 큰 위기가 온 것이다. 치매가 흔하다고 하지만 부모형제나 주변에 치매를 앓은 사람이 없다. 의료대란이라 대학병원에 예약하기가 힘들었다. 가슴이 저미는 느낌,  머리는 진정하자고 하는데 마음에는 썰물이 일고 막막했다. 어떻게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사고가 마비되면서도 생각을 해야만 했다. 우선 주변에 도움을 받기로 결심했다. 병은 알리라고 했다. 창피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의료대란으로 예약은 쉽지 않았다.


64세. 그렇게 책을 좋아하고 가까이하던 그가 책을 읽지 않았다. 일상생활도 가능하고 운전도 가능하고 나랑 농담하며 잘 웃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하느님, 제발 저에게서 이 잔만은 거두어 주소서.


진료의뢰서를 들고 서울에 먼저 잡힌 병원 두 곳을 다녀왔다. 지방에서 서울로의 진료받기는 몹시 고단했다. 숙박과 교통편, 식사까지 모두 걱정해야 했다. 아이들이 나서서 숙박장소를 알아보았고 엄마인 내 상태를 체크하느라 모두 진이 빠졌다. pet ct와 뇌파검사를 예약하고 두 곳의 진료를 보고 결과 듣는 날은 5월 말에 예약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 잠을 깨면 새벽이다. 한없이 쳐지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막막하다.

작가의 이전글 제주욕망일지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