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때

경도인지장애

by 천천히바람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일이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와 아내를 보살피고 간신히 잠이 든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 후에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 어질러진 집안을 대충 정돈하고 시계를 봤더니 자정이 넘은 거예요. 완전히 지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주저앉아 있는데, 불현듯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죠. 순간 주체할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허공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어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고요.


누구나 그런 상황에 닥치면 커다란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해내려고 죽을힘을 다하죠. 하지만 어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고 속이 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랬죠. 슬프게도 저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종류의 일들을 겪게 됩니다. 개인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커다란 문제가 불시에 닥치고,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고통을 마주하게 되죠.


- 오래된 질문, 다큐멘터리 <Noble Asks> 제작팀/장원재 지음 -



어제 아주 오래전에 남편과 함께 일했던 후배직원이 안부전화를 했다. 남편은 직원에게 존대를 했고 직원은 어색하게 왜 그러시냐고 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직원들끼리 만나는 중에 남편근황이 궁금해 전화를 했다고 했다.


올해 4월, 남편 상태를 본격적으로 의심하기 전에 남편은 무음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했다. 소리가 거슬리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대화나 자연스러운 소리는 괜찮은 것 같았으나 텔레비전과 전화는 거슬려했다. 후배와의 통화도 스피커폰으로 하며 내 옆으로 와서 전화를 건넸다. 본인이 통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는지 아이들이 전화를 해도 몇 마디 하다 내게 넘기는 것이 요즘 일상이다.


나도 아는 그 직원과 인사를 나누며 남편이 그냥 아프다고만 했다. 본인 인생을 사느라 여유 없는 사람들에게 남의 얘기는 그저 그런 안주거리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은 위로하기보다는 위로받고 싶은 것이 우선인데 이런저런 사연을 얘기해서 아주 잠깐의 동정이나 위로를 받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올해 4월 남편은 MRI상 뇌의 위축, 인지검사 등을 통해 하위 0.2%의 단기기억력, 문제해결과 언어능력의 저하를 알게 되었다. 좌측뇌의 위축이 특히 심하여 초기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이 또한 만 65세 이전이라 초로기 치매가 의심된다고 상급병원진료를 권고받았다. 서울 상급병원에서 혈액검사와 PET CT 등을 추가로 검사하였고 결과는 5월 27일에 의사면담을 통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고 하였다. 치매는 알츠하이머로만 알고 있었으나 그것은 많은 사람이 걸리는 치매의 한 종류일 뿐 약이 별로 없는 다른 치매도 있었다. 남편의 경우는 초로기, 즉 65세 이전에 발병하였고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알츠하이머가 아닌, 진행속도가 빠르고 약이 없는 다른 치매일 경우가 높다고 하였다.


4월부터 5월 말까지 걱정을 넘어선 두려움이 나를 휘감았다. 매일매일 통제가 되지 않는 눈물을 경험하며 산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 노년의 부부란 지나간 기억을 설명하지 않고 함께 떠올리며 웃는다. 아기 때의 귀여웠던 우리 아이들의 모습, 신혼시절 돈이 없어 열나게 싸웠던 기억, 예전에 살던 곳을 지나갈 때 떠오르는 그 시절들 이런 모든 것을 이제는 남편과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남편의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더 좋은 것을 나누어야만 한다는 강박도 생겼다.


5월 27일 결과를 들으러 신경과에 딸과 남편과 함께 갔다. 도저히 혼자서 갈 용기가 없어 딸이 휴가를 내서 함께 갔다. 혼자 진료실에 먼저 들어가서 의사에게 나쁜 말은 보호자인 내 앞에서만 하고 남편에게는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선행 진료에서 약도 없이 빠르게 진행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확인차 다른 상급병원도 한 군데 더 가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기에 최악을 예상했다. 아들이 했던 말이 가장 좋은 결과는 약을 먹을 수 있는 알츠하이머로 진단 나는 것이냐고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 이해도 완전하게 되지 않는 남편이 더 의기소침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딸과 남편은 밖에 있었다.


권위자로 알려진 의사 선생님이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 남편도 딸도 들어오라고 했다. 그날은 마음이 담담했다. 의사가 PET CT결과 치매환자의 뇌에 쌓이는 베타아밀로이드가 없으므로 치매는 아니라고 하셨다. 믿을 수도 없고 좋은 일인지 안 좋은 일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2차 병원의 의사가 특이한 경우라고 상급병원으로 가라는 것이 이런 경우였는지 모르겠다. 뇌의 위축은 상당히 진행이 되어서 노력을 많이 해야 하고, 뇌 위축의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알코올로 인한 것일 수 있다고 하시며 경도인지장애로 진단을 내리셨다. 뇌영양제만 처방을 받고, 사교활동, 인지활동, 운동을 다짐받고 다음 예약을 잡고 나왔다. 그날 남편은 웃고, 나는 울고 딸은 그런 우리를 격하게 위로했다.


천 걸음을 움직여야 한 걸음 조금 나아지는 것이 이 병인데, 나는 조바심이 난다. 치매가 아니라고 감사하였으나 남편은 말수도 줄고, 통화를 할 때는 어색한 것이 점점 더 표가 난다. 그러다 나도 서서히 우울해지는 것 같아 스스로 격려한다. 더 암담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며 천 걸음을 움직여야 한 두 걸음 나아가는 병임을 다시 얘기한다. 사소한 전화에 와장창 무너져 내릴 수도 있지만 아직은 함께 손잡고 걸을 수 있고, 지나간 기억이 마냥 좋은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지 않을까 억지를 부려본다. 그럼 좀 나을까? 새벽부터 비도 내리고 삶은 내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결혼생활의 가을을 끌고 간다.


경도인지장애를 검색하다 보호자들의 하소연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들의 암담함을 나도 겪었기에 솔직히 외면하고 싶다. 그 고통이 읽고만 있어도 가슴에 온전히 전해진다. 진심으로 공감한 내게 전해진 고통만큼 그들의 고통이 경감되길 간절히 바란다. 장수의 이면에 담긴 치매와 인지장애의 문제는 분명 더 심각해 질 것이다. 저출산으로 자녀들이 온전히 감당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누군가의 위로나 참고용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우리부부의 인생의 가을을 담담히 적고 싶다. 남편은 몹시 까탈스럽고 너그럽지는 않았으나, 자기 삶에 성실했고 가족들을 부양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신은 그에게 기억의 일부를 잊고 편안하게 살라고 그러셨을까? 알 수 없는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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