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착한 애들은 모두 바보였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넘은 후로는 그렇게 착한 마음이 생기는 날이 참 드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철이 들면 더욱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니, 내가 아는 착한 애들은 모두 바보였다. 그 당시 나는 단지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 모순, 양귀자 -
심리학책을 읽다 보면 유년시절이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더 정확히는 성인의 삶까지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는 내용이 나온다. 처음 관련 책을 읽을 때,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시절에 형성된 것들이 전 생애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장아장 걷던 내 유년시절은 이미 다 지나갔고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시절이 현재의 내 삶을 지배할 수 있을까? 무식하면서 경험도 적은 독자인 나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당당하게 무시했다.
그러다 세월과 함께 살아내야 하는 삶이 주는 돌발변수 - 배우자의 선택, 자녀에 대한 부적절한 기대와 양육방식, 친구 간 우정의 변화, 노부모의 부양, 건강 등 - 를 만나면서 나조차 깜짝 놀라는 내 모습과 마주치고 침묵하게 되었다. 예기치 않게 마주친 밑바닥의 내 모습은 정말로 싫어했던 부모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심지어 예측할 수 없이 화를 내고 일관성이 없던 엄마의 양육방식을 내 자녀들에게 내가 서슴없이 들이대고 있었다. 알량한 타이틀인 부모를 절대군주로 착각했던 나는 절대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한 뒤에야 어리석은 나를 발견했고 그 어리석음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내 진바닥의 모습에 강펀치를 맞고 정신을 아주 조금 차린 나는 이제 전문가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내 유년시절을 돌이켜 본다. 더 살아내야 하는 삶에서 실수를 줄이려면 내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뒤늦은 숙제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내 부모님은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이해도 선행되어야 한다. 세월이 지나 돌이킬 수 없다고 그저 묻어버리면 잘못은 자연스럽게 반복된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개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여러 자식을 두셨지만 살아남은 네 명의 아들들은 줄줄이 딸만 낳았다. 세 번째 아들이자 일곱 번째 자식인 41년생 우리 아버지만 떡하니 1남을 두고 그 뒤 나를 낳았다. 장손인 큰아버지는 딸넷을 둔 뒤에야 1남을 얻고 하나를 더 바라고 낳았으나 마지막도 딸이었다. 종손을 학수고대하던 할아버지가 큰며느리가 줄줄이 딸을 낳자 셋째 손녀의 이름을 조상님께 분풀이하듯 분하다고 분자하고 지었다. 신줏단지도 마당으로 던지셨다고 한다. 넷째는 인내심의 한계에 이르러 마지막이라고 마자라고 지었고 언니는 성인이 된 후 이름을 개명했다. 그 뒤 드디어 종손이 태어났다. 그 귀한 종손은 비가 오는 날이면 발에 물이 닿을까 누나의 등에 업혀 국민학교를 다녔다는 전설에 가까운 얘기가 있다. 둘째 큰아버지도 1남 5녀, 우리 집 1남 1녀, 작은집 4녀 총 3남 15녀이다. 7,80년대만 해도 명절에는 큰집에 모여 누군지도 모르는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면 딸들은 누구인지 몰라했고 나는 나이로 15명의 여자사촌 중 11번째 딸이었다. 나의 번호는 11번이었다.
6,70년대 경상도에서 아들이 귀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 사촌언니들은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공장 등으로 일하러 갔다. 아들이 잘 되어야 부모도 봉양하고 집안이 일어선다는 신념을 강요받고 부모의 뜻에 따라 당연하게 희생했던 사촌언니들은 세월이 흘러 본인들이 부모를 봉양했다. 그 언니들보다 다소 늦게 태어난 나는 언니들의 얘기가 남의 얘기인 줄 알았으나 나 또한 오빠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라면서 부당함에 항의하지 못했다. 그러다 직장을 다니며 나와 동시대의 다른 친구들이 받는 대접을 보며 서서히 혼란스러웠고 요새말로 가스라이팅이 풀리기 시작했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엄마는 여전히 오빠네 걱정을 태산같이 하며 친손자와 외손자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였다. 그러면서 감정쓰레기통으로 나를 이용하고 본인의 노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주지 않는 아들과 며느리 얘기를 시도 때도 없이 하였다. 그러면서 본인이 필요한 잡다한 일은 내게만 시켰다. 서서히 차오르던 분노가 어느 날부터 표면으로 드러났다. 말투와 행동으로 내 화가 드러났다. 화를 내면서도 결국은 들어주던 부탁도 서서히 들어주지 않았다.
엄마는 우리 집안 서열 1위였다. 아픈 아버지는 경제적 능력이 없었고 생활력 강했던 엄마는 본인의 감정대로 가족에게 화를 내고 정당화하고 사과할 줄 몰랐다. 혼자 돈을 벌던 엄마도 분명 힘들었으나 일관되지 않게 화를 내던 엄마로 인해 기댈 곳이 없었던 어린 나도 분명 아주 힘들었으나 엄마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때는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억울했지만 참아내었다. 그렇지만 그 억울함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어느 날 툭툭 튀어나오고 있다. 결혼하는 결혼하는 오빠를 위해 새 아파트를 사줄 때도 그 대출을 알아보라고 네게 지시할 때도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빠 혼수로 쌍기러기를 산다고 혼자 결혼 준비하고 내가 모은 돈으로 결혼하고 애 낳고 직장 다니던 나를 데리고 퇴근 후 저녁 늦게 혼수시장에 가며 오빠 결혼은 잘 준비해서 보내고 싶다는 말에 나는 아주 아주 상처를 받았다.
가스라이팅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과일을 먹어도 좋은 쪽은 모두 가족에게 주고 나를 대접할 줄은 모른다. 선함과 배려가 아니라 가스라이팅의 잔재가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 나는 이제야 내 가족의 범위를 정확히 설정했다. 나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내 도움에 고마워하는 사람이 가족이다. 엄마도 시어머니도 항상 요구사항만 있었다. 책에서 본 가슴 절절한 자식에 대한 사랑을 남편도 나도 절절하게 받아 본 적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30대에 이유 없이 오래 아파서 어느 순간부터 2주간 물도 삼키기 힘든 적이 있었다. 그 시절 내 옆에서 병원을 알아봐 주고 걱정했던 사람은 내 친구뿐이었다. 엄마도 어머니도 그 당시에는 남편도 약 한 첩, 서울병원 가는 길에 점심이나 먹으라고 단 돈 만원을 준 사람도 없었는데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내 마음은 절로 애가 끓던데 나는 그 마음을 받은 적이 없으니 한스러웠다.
내게는 받는 것에 익숙한 어른들은 늘 그렇듯 부당한 요구를 자연스럽게 갖은 방법을 쓰면서 했다. 결혼을 하니 시어머니는 더 했다. 어디가 아픈데 어느 집 자식은 이런저런 약을 사주고, 어느 집 아들은 매달 용돈을 얼마씩 준다, 방에 작은 냉장고가 따로 있으면 좋겠다, 심심해서 못살겠다. 오직 본인만 생각하는 얘기를 하다 내 남편이자 당신의 아들이 아픔과 동시에 아주 강한 나의 저항에 부딪혔다. 삼십 년간 충분히 했으니 더 이상 요구하지 말라고 세상 뜨는 데 순서 없다고 분노에 가득 차 얘기했다. 남편과 나의 앞에 놓인 이 험난한 상황에도 오직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는 모습에 가슴에 가득 고여있던 그 응어리가 터져 나왔다. 왜 우리는 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지 서로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 내가 아는 착한 애들은 어릴 적 엄마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다른 남에게 사람 좋다는 말을 듣고자 양보에 익숙한 것은 아닐까?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충분히 사랑받은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를 있는 그대로 절절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니 굳이 타인의 사랑에 목마르지 않을 것 같다. 엄마는 본인이 기분 좋을 때 나를 사랑해 주었다. 삶의 여유가 없어서 그랬음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 시절 어린 나도 분명히 어른의 일관성 있는 사랑이 필요했다. 엄마를 이해하기 전에 어린 나부터 이해해야 했다. 양귀자의 책에서 저 구절을 발견하자 주인공이 참으로 기특했다.
철이 들면 더욱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니, 내가 아는 착한 애들은 모두 바보였다. 그 당시 나는 단지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 더 착하게 굴어 타인의 사랑을 갈구할 필요도 없다. 나는 충분히 자랐고 내가 필요했던 시기의 사랑은 이미 놓쳐버렸음을 잘 깨우치고 나를 보살피면 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호구가 되고 싶지 않다. 내속에 여전히 꺼진 것처럼 보이는 가스라이팅의 잔재가 어서 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