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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Aug 26. 2023

너무 조용하지 않은 고요함

옛 기억 마주하기 2

사무소 공기는 유리창을 열어젖힌 여름 별장에서 새와 벌레 울음소리, 잎사귀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예초기 엔진 소리 등에 섞여 느긋하고 편안한 공기로 바뀐다. 나는 이 너무 조용하지 않은 고요함이 좋았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휴가, 왜 봄, 가을, 겨울을 빼고 여름에만 휴가를 주었을까? 입사한 첫해 휴가날짜를 적으라고 해서 적었더니 신입이 먼저 적었다고 선배가 나무랐다. 사회생활은 눈치가 반인데 도대체 어디서,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지 감이 없었다. 세월이 가르쳐 준 바에 의하면 상대방의 허영심 포인트에 눈치를 봐야 했다. 이쁜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이쁘다. 인정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선배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 사이코 팀장에겐 항상 단답형으로. 뭐 그래봤자 퇴사는 선배들이 먼저 했다. 좋은 관계를 남긴 선배라야 지나가다 반갑다고 인사라도 나눈다.


지나간 것은 그리움을 섞어서 미화를 하고 나의 철없음도 한몫하여 좋게 보려 한다. 너무 조용하지 않은 고요함을 회사생활 내내 바랬다. 그러나 고요는 오지 않았다. 회사를 나오자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서서히 정말로 서서히 보였다. 삶에서 돈과 인정이 성장인 줄 알았는데 둘 다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인생의 고요함은 돈과 직책으로 결코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고요함은 나를 돌아볼 충분한 시간, 내가 자연의 소리를 보고 듣고 교감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필요한 타인에게 내 시간을 나누어 주는 배려, 그러한 시간의 나눔과 우주가 주는 따뜻함으로 얻어지는 것이었다.


돈으로 명품을 사면 얼마동안 행복할까? 신상이 나오기 전까지, 친구가 더 좋은 걸 사기 전까지 아닐까? 시간으로 고요함을 사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행복이 오랫동안 머무는 것을 느낀다. 은퇴 후 시간부자가 되면서 무료하지만 고요한 행복을 느끼다 보면 문득 눈치 봤던 젊은 날의 여름휴가가 떠오른다. 가기 전 잠깐 설레고, 가서는 피곤했고 마지막 날은 내일 또 회사 가야 함에 몹시도 지쳤던 그 날들, 그러면서 가서 어디가 좋았다고 약간의 자랑을 했지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곳이다.


나는 그 시절에 눈치가  없었지만 지금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시간 부자가 되었다. 부자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시간을 누린다. 시간 부자가 되어보니 떠다니는 구름도, 바람도 어제와 다름을 느낀다. 그리고 눈치 없이 자연에게 말도 건넨다. 쭉 친하게 지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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