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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Sep 07. 2023

독학으로 심리학 공부 5

그 여름의 서울  - 이현 -

"하지만 그건 어쩌다 있는, 그래, 성탄절에 교회에서 나눠주던 미제 초콜릿 같은 거야. 사람은 말이야, 굶어 나자빠지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기름진 음식으로 제 배만 채우면 그만이야. 제 배 채우기 바쁜 게 사람이라고. 어린애가 굶주리든 노인네가 추위에 떨든, 사람이 그걸 해결해 줄 수는 없어. 가난한 이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도 있지 않느냐고? 맞아, 있지. 나도 덕분에 뜨신 밥 얻어먹은 적 많아. 하지만 그건 원래 내 것이 아니잖아. 그들의 것을 내게 나눠 주는 거잖아. 난 그런 동정심은 싫어. 가진 자들의 마음먹기에 따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호의 따위, 조금도 믿을 수 없어. 난 내 몫을 원해. 내 자리를 원한다고. 내가 믿는 건 오직 그뿐이야."


명동은 전쟁 따위 모르는 듯 한가로웠다. 찻집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고급 양복점 쇼윈도에는 깃에 털을 단 코트가 당당히 내걸려 있었다. 중국집 유리창에는 난데없는 마릴린 먼로의 커다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명동 성당 건물에 남은 총탄 자국만이 눈치 없이 전쟁의 속살을 드러냈다. 문을 닫은 몇몇 상점들을 제외하면 피란령과는 무관한 세상으로 보였다.


"그러니 침 한 번 뒤집어쓴 걸로 억울해 마라. 나는 총알 뒤집어쓰러 가는 길이니. 사격 훈련 딱 한 시간 받고 바로 전선으로 나가는 길이다. 봐, 나 안경도 없잖아. 안경 없으면 1미터 밖도 안 보인다고 했다가 또 얼마나 얻어터졌는지••••. 하긴, 총 쏘라고 내보내는 거겠냐? 총알받이 삼으려는 거지. 보이든 안 보이든 무슨 상관이겠냐? 하긴 나도 그렇다. 매 맞아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그래고 시원하게 총질하다 죽는 게 낫지."




<그 여름의 서울>은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여름 전후를 배경으로 한다. 전작인 <1945, 철원>과 이어진 내용으로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해방직후 남과 북의 이념대립 속에서 보통 사람들의 시달림 과정이 담겨 있다. 이념이랑 아무 상관없이 먹고살기 위해 이편저편이 되었더니 상대편이라고 죽임을 당하고 그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남은 가족들의 절규다.


부모가 모두 죽고 혼자 더부살이하며 고생고생한 봉아가 열다섯 살에 남에서 외삼촌을 만났다. 외삼촌은 봉아를 지키고 싶지만 그는 살 집도 없이 여관을 전전하는 처지였다. 어린 봉아는 인간의 본성을 진작에 깨우친다. 인간은 옆에서 누군가가 죽어가도 내 배 채우기 바쁘다는 것. 교과서에서는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으라지만 현실은 과연 그럴까? 사회가 돌아가게 하려고 너무 선한 면만을 강요하였던 건 아닐까? 콩 한쪽을 과연 나눠먹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인간의 본성을 학교가 아닌 사회에 나와서 배웠다. 대체적으로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해피엔딩과 권선징악은 없었다. 사람을 가려가면서 착해야 하고 마음을 나눠야 하며, 그랬던 사람도 상황에 따라서는 돌변하여 나를 모른 체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전쟁 중에도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고 고급 양복을 입었다. 고아와 굶주리는 사람 사이에 전쟁으로 떼돈을 번 사람도 있었다. 배부르고 고급옷을 입은 사람이 많이 가졌다고 인정하여 콩 한쪽이라도 가난한 이와 기꺼이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다. 인간은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자만 보이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한 자의 심정과 고달픔을 이해하기 쉽다. 겪어보았으므로. IMF시기에 대출이율이 엄청 올라서 월급을 받으면 이자로 다 나갔다. 아이를 봐주던 어머니께 드리던 돈을 좀 깎아달라고 하였더니 거절하였다. 그간 아이를 맡긴 죄로 내 것보다 더 비싼 것을 시어머니께 수시로 사드렸다. 고맙다는 말도 듣지 못했지만 그리 하는 것이 착한 일이라 오랫동안 그리 하였다. 나는 돈이 없어 절절매는데 어머니는 이율이 높아진 적금을 들었다. 드디어 깨달았다. 모두가 한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내 것과 네 것이 따로 있음을.


길재는 전쟁 전에 경기 중에서 1등을 도맡아 하고 성실하고 의리 있는 학생이었다. 그러다 제일 가난하여 맡은 감투 때문에 아버지는 처형당하고 그는 군대로 끌려와 얻어터진다. 변해버린 길재가 부잣집 도련님 절친이 자기 앞을 지나자 침을 뱉는다. 절친은 길재가 자기를 오해해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오해를 풀려고 한다.  그때 길재가 한 말이 "침 한 번 뒤집어쓴 걸로 억울해 마라. 나는 총알 뒤집어쓰러 가는 길이니"이다. 생사와 억울함 앞에 선 길재에게 절친이 오해를 하든 말든이 중요할까? 가진 자는 이런 사소한 것에도 신경이 쓰이지만 곧 끌려나가 총알받이가 되는 자에게 그게 뭔 대수라고.


책에서는 의롭고 선하게 살려던 인물이 갑자기 변한다.  상황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그들 또한 악인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잘못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악인과 가해자가 나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조차 착하게 대하려 했던 선인들도 깨달아야 한다. 모두에게 칭찬받고 살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것을. 나는 회사생활도 가정생활도 잘하고 싶었다. 내가 더 노력하고 더 참으면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살면서 깨달은 것은 인연은 끝이 있기 마련이다. 무엇을 누구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고 최선을 다했는지를 생각할 기회가 있어야 했다. 나만이 아니라 같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한 사람의 희생 위에 세워진 가정과 회사는 건전하지 않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나는 조금 덜 참고 조금 덜 노력해야 한다. 분발해야겠다. 덜 노력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가 해야지 하는 마음을 숨겨야 한다. 상대에게도 선할 기회를 줘야 한다. 그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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